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힘은 사람이다.
1997년 서른일곱이던 난 전남 여수에 있는 특성화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취업했다. 60 학급 약 2,700명 학생과 교직원 120명이 있는 사립학교다. 교직원 연령대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이동이 없는 사립학교 특성상 교직원들은 가족 같았다. 전교생이 많은 만큼 보건실 드나드는 아이들도 넘쳐났다. 다행히 보건실 위치가 교무실 앞이라 여러 선생님이 도와주었다.
첫 출근이 엊그제 같은데 내년 2월이면 정년퇴직이다. 그동안 학교는 조금씩 변했다. 삭막하던 교정이 꽃과 나무들로 채워졌다. 먼지 풀풀 날리던 운동장은 인조 잔디를 덮어 파릇파릇하다. 그와 달리 학생, 학급, 교직원 숫자는 줄었다. 여전히 변치 않은 것은 교직원들의 끈끈함이다. 나는 친분을 나누던 선생님 중 절친도 생겼다.
음악 선생님인 그녀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인 친구다. 그녀는 아나운서처럼 명확한 발음과 맑은 목소리를 가졌다. 학생을 지도할 때도 노래하듯이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학생과 교직원은 그런 그녀를 존경하면서 따른다. 나도 다정한 그녀에게 서서히 젖어들었다. 우린 가끔 퇴근 후 포도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틈틈이 두서없는 글을 쓰던 난 그녀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계속 써보라며 응원을 해줬다. 방학이면 국내 여행을 하며 30대 이후 만난 우리의 우정을 과시했다. 자연스럽게 가족들까지 친해졌다. 그녀 남편은 우리를 시샘하듯 말했다.
“여자들 우정도 남자 못잖게 진하구먼. 두 분 사이가 부러워”
광주광역시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인 그녀 남편은 2021년 2월 정년퇴임했다. 주말부부인 그 둘은 여수에 살림을 합쳐 두 번째 신혼을 맞이한 듯 깨가 쏟아지고 있다. 그녀 남편은 자칭 ‘김 주부’가 되어 집안 살림을 맡았다. 종종 그녀를 통해 당신이 만든 음식을 내게도 배달해 준다. 난 그 둘의 사랑에 점점 더 몸과 마음이 풍성해지는 중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고 있다. 나는 보답하고자 하지만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난 늘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들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큰 용기를 내 얼마 전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 일상의 글쓰기 수필창작 교실’에 참여했다. 제멋대로인 글을 제대로 쓰고 싶은 내게 필요한 수업이었다. 난 흩어져진 것들을 모아쓰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글이지만 교수님 조언대로 무조건 써 내려갔다. 생각들이 글로 써질 때 기분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2020년 4월 ‘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으로 시작된 원격수업을 위해 교육부에서 ‘노트북’이 지급되었다. ‘노트북’은 때와 장소 구분 없이 즉시 사용하기에 편한 기기다. 교육부 재산인 이것이 글을 쓰는 나와 함께했다.
하지만, 내년 2월 퇴직과 함께 반납해야 한다.
그녀는 수필 교실을 다니면서 들뜬 얼굴로 글을 쓰는 나에게 “멋지다! 내 친구!”라며 격려했다. 상대의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칭찬하는 사람이다.
며칠 전 출근한 나를 ‘새 노트북’이 반겼다. 너무 놀랐다. 사고 싶어 여기저기 찾아보는 중이었는데, 내 책상 위에 있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왔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네가 글을 쓰고 나에게 읽어줄 때 표정이 정말 사랑스러웠거든. 몰랐지? 이 노트북으로 원 없이 글을 써봐. 요즘 수필 수업 다니면서 더 활기차고 행복해 보이더라. 그런 널 바라보는 나도 즐겁고 좋아. 알지. 내 마음! 수필 수업 후 네가 읽어주는 글을 듣다 보면 생선살이 점점 차올라 맛있어지는 느낌이야. 축하해. 발전하고 있는 내 친구 김 작가님!’
아침부터 난 울었다. 상대를 관심 있게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는 그녀였기에 가능한 선물이었다. 흐르는 눈물 말고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날이다.
나는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큰 힘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벼랑 끝에 몰려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그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살아갈 힘이 생김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힌 나를 보면 그녀는 항상 손 내밀어 잡아준다. 따뜻한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 난 힘을 내 살고 있다. 부족한 나를 끊임없이 채워주는 그녀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와 함께 그녀 목소리가 들린다.
“Time to say goodbye~~”
변성기 지난 남학생들의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따라온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세계적인 테너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와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 부른 듀엣곡이다. 이탈리아어인 ‘Con te partirò’는 ‘너와 함께 떠나자’라는 의미로 보통 졸업식이나 결혼식 같은 새 출발을 축하하는 곡이다. 영어로 제목을 바꿔 독일 유명 복서인 ‘마스케’의 마지막 경기 후 고별 곡으로 쓰였다. 그 후 ‘Time to Say Goodbye’라는 영어 제목 탓인지 이별을 슬퍼하는 대표적인 곡이 되었다. 문득 내년 2월 퇴임식을 할 내 모습과 음악실에서 피아노 치는 그녀, 노래하는 학생들이 그려진다. 난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르며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해본다.
“그녀, 음악 선생님 고맙습니다.”
https://youtu.be/DuvZH8TipME?si=jhcfd1rIWwt-M3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