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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Nov 15. 2023

우리 천천히 걸어갈래?

이제는 꽉 쥐었던 주먹을 펴야겠다.

 딸과 사위가 서울 나들이를 가자한다. 

내년 2월 정년퇴임과 올해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고. 

먼 길 가야 하는 수고로움에, 


"서울까지 너무 힘들잖니? 내가 퇴근하고 마산으로 갈게."


딸이 목소리 높여, 아니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아! 사위가 모신다잖아. 그냥 알았어라고 하면 안 돼!"


난 살짝 꼬리를 내린다.


"알겠어. 너희 둘이 너무 힘들까 봐 그랬지."


 그렇게 지난 주말 서울나들이를 했다.

금요일 퇴근하고 딸과 함께 온 사위 녀석이 듬직했다.

직장인이 쉬는 날 부모 모시고 나들이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토요일 아침 우린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공식적으로 서울 입구까지 320KM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서울로 서울로 데모하러 가는 버스들이 줄을 이은 고속도로는, 

앞바퀴 한번 구르면 뒷바퀴는 한참 후에 굴러야 될 정도로 밀렸다.

남자 기운이 넘치는 사위 녀석은 두 여자 안전만 신경 썼다. 

운전자가 더 고생인데 말이다. ㅎㅎ

딸과 난 회장님 포스로 편안하게 서울까지 갔다.

둘이 나를 위해 예약해 둔 이곳저곳을 다녔다.

지방에서만 살았던 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고개가 가만히 있질 않았다.

눈동자를 너무 굴려 아플 정도였다. 볼거리가 넘쳤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봐야 하나 보다.


우리 셋은 용산구, 종로구를 걷고 또 걸었다. 차가운 바람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김치 dining bar'라는 생소한 곳에서의 저녁 식사는 신기했다.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김치라고는 상상도 안 되는 음식들이 날 홀렸다.

집에서만 마시던 와인을 고급 식당에서 처음으로 마셨다.

말해 뭐 해!! 해봐야 그 기분을 알지.

저녁 먹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술 집까지…(ㅎㅎ 셋다 술을 사랑한다^^)

그렇게 1박 2일을 꽉 채우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긴긴 시간 안전 운전을 책임진 사위 덕분이다.

그 둘은 그들의 직장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깊은 마음으로 날 생각하는 그 둘이 있어 '쉼'이 더 기다려진다.

 우리 셋은 쉬엄쉬엄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갈 일만 남았다.


'동서식품' 사보인 '삶의 향기'에 '휴식'이란 주제에 맞춰 썼던 글이다.


<이제는 꽉 쥐었던 주먹을 펴야겠다.>

 내년 2월이면 정년퇴직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을 남기고 남편이 떠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두려움에도 울지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과 살기 위해 여기저기 시험을 보고 다녔다. 

하늘이 도왔는지 여수에 있는 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취업했고, 

어린 딸을 두고 행여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 봐 주먹을 불끈 쥐고 앞만 보고 달렸다. 

막냇동생 집 방 한 칸에서 네 번의 이사를 거쳐 2020년엔 드디어 내 집 마련까지 하였다. 

주변에 살고 있는 친정식구들 덕분에 딸과 난 힘들어도 나름 즐겁게 지낼 수가 있었다. 

딸에게 공부하는 엄마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진학한 대학원 석사과정도 무사히 마쳤다. 

한 부모 가정이란 아픔을 저 깊은 마음속에 감추고 자란 딸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엄마에게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며 제법 듬직하게 나를 다독였다. 

딸은 성장해 작년 4월 결혼했다. 

결혼식 날 먼저 떠난 남편이 몹시 그리웠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우리 둘이 대견해 서로에게 위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27년 동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두 주먹 불끈 쥐고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난 이제 주먹을 펴려고 한다. 이제는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때가 된 것이다. 

매일 왕복 80km를 달리던 직장을 퇴직하면, 여수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직장인으로 출근했던 여수를 관광객으로 방문해 온전히 나를 위한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이다. 

가끔 출근길에 서러움을 토해냈던 만성리 해수욕장에 들러 편안하게 바다 구경을 하고, 

그러다 남자를 만나게 되면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도 이어갈 것이다. 

경북 포항을 떠나면서 아프도록 꽉 쥐었던 주먹을 이제 펴려고 보니, 

그때부터 함께했던 어린 딸이 그 작은 주먹을 나보다 더 꽉 쥔 채 서있는 게 보인다. 

그래서 딸에게 한마디 하려고 한다.

"딸, 우리 이제 꽉 쥐었던 주먹을 펴고 천천히 쉬어 가면서 걸어볼래."라고.(삶의 향기. 2023년 7.8호)


우리 셋 다음 여행지는 내년 2월  제주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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