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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님 Jul 04. 2024

통신표

통신표를 선생님이 잃어버리셨다고...

학교 학기 말이 되면 떠오르는 통신표에 대한 기억들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담임을 하셨다.

면 단위에 하나 있는 학교에 학급도 한 두 학급이니 딸의 담임을 피할 수 없으셨는지 모르겠다.

호롱불 밑에서 펜에 잉크를 찍어가며, 신중을 기해 통신표를 쓰셨다. 통신표에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의견 란이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평가형식과 처리방식도 달라졌지만 이 의견란은 지금도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몇 장 쓰고 넘기시던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우리 정님이, 뭐라고 써 줄까? “     

지금 기억에 없으니 궁금하다. 뭐라고 써 주셨을까.




초등학교 5, 6학년쯤 되었을 것 같다.

아버지께서 담임 학급의 통신표 작성에 나를 동참시키셨다. 통신표는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써야 하는 수작업이었다. 성적평가는 각 과목별로 수, 우, 미, 양, 가 5단계였다. 빨간 인주를 묻힌 붓대롱을 해당하는 성적의 평어 위에 찍었다. 산수 성적이 ‘우’라면, ㉾ 이렇게 붉은 원을 입히는 것이다. 이름과 성적을 맞추어 가며 하라고 하셨다. 틀리면 안 된다고도 하셨다. 호랑이만큼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실수할까 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

뭔가 잘못됐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단순 작업이라 생각하고 시키셨는데, 오히려 더 큰 일거리를 만들어 버렸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말, 방학과 함께 통신표를 받아 드는 날이었다. 방학을 어떤 기분으로 시작하느냐는 이 종이 한 장에 달려있었다. 통신표를 펼쳐본 순간 절망이었다. 이렇게 성적이 떨어진 것을 부모님께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다. 방학식 날은 하교가 빨랐다. 하루 몇 번만 다니는 버스가 이른 하교 시간과 맞지 않았다. 통학생 모두가 버스를 오래 기다리느니 차라리 걸었다. 집까지 25리를 걷는 내내 생각에 생각을 더해 묘안을 짜냈다. 부모님께서 말씀이 없으시지만 통신표를 기다리시는 눈치였다.

"선생님이 통신표를 잃어버려서 없대요. "

"으흠"

아버지께서 조용하고 낮게 헛기침을 하시고는 이후 두말도 없으셨다.1학기 때 받은 통신표에 부모님 도장을 받아 제출했었다. 제출한 통신표에 2학기 성적을 더해서 다시 내주는 것이니, 선생님께서 1학기 통신표를 분실하실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통신표 관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소중히 다루시는지 어려서부터 보아 왔으면서도 그런 허술한, 유리알 같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철들어 웃음이 난다. 통신표에 대한 일로, 교사이신 아버지를 속이려 들다니 겁도 없었다. 모른 척 속아주신 아버지께 죄송하고 감사하다. 이제라도 속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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