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때가 되면 홍수로 등교를 하지 못했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억수로 쏟아지던 장대비가 그치고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렸다. 비가 좀 잦아든 틈을 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오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밤새 내린 비로 엄청나게 불어난 물이 다리 위까지 범람하고 있었다. 여기에 다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건너야 할 멍청이 다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멍청이 다리’는 다리 높이가 양쪽의 지면보다 낮은 데다 난간도 없었다. 이름 그대로 멍청한 다리였다. 물에 잠긴 다리를 평상시 기억대로 건너다 다리 난간으로 떨어지면, 급류에 휩쓸리는 사고로 이어질 것이었다.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선생님이 안전지도 차 나와 있었다. 짓궂은 남학생 하나가 다리를 건너려는 시도를 했다. 선생님이 다급한 몸짓으로 손을 앞뒤로 저으며 뭐라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물소리가 속절없이 삼켜버렸다. 아마도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 일게다. 애타는 선생님의 뜻을 받아들여 합법적으로 학교를 안 가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하기도 애매한 몇 걸음 걸어 들어온 자취방이다.
얼마 후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날 어떤 사람이 무리하게 소를 몰고 건너다 소가 발을 헛디뎌 떠내려갔다고 한다. 다행히 소를 건져 내어 살리기는 했단다. 근데 소가 물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허우적거리며 물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며 떠내려 가더라는 목격담이 전해졌다. 생명의 위대함이었다.
삼계에서 나오는 길이 오수 길과 합해지기 전에 오수천이 흐르고 있었다. 오수천을 가르는 멍청이다리가 시작되기 전, 오른편에 집이 두채 있었다. 그중 한 집에서, 1학년 한 명과 2학년 네 명이 올망졸망 한방에서 자취를 했다. 통학시간 대에 운행하는 버스가 없으니 통학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개인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거나 체념했어야만 동거가 가능한 좁은 공간이었다. 같은 2학년이어도 한 명은 초등학교 1년 선배인 언니였다. 그 나이 때는 한 살의 역량이 참 큰 것 같았다. 식사며, 생활에 관한 소소한 지혜들을 나누며 챙겨주었다. 그 언니에게 다섯 명이 자취했던 일이 지금까지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해 준 고마움을 언젠가는 전해야지 하면서도, 중학교 졸업 후 지금도 만나보지 못하고 있다.
얼마 지나 어떤 연유인지 두 팀으로 나뉘어 옆마을로 옮겨 방을 얻게 되었다. 나는 나중에 합류한 3학년 선배언니와 둘이고, 나머지는 셋이 한집에 살게 되었다. 내가 사는 방은 안채와 돌아앉은 방이었다. 부엌에서 불을 때, 난방과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 구조였다. 부엌은 문이 없어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 보였다. 방문을 열면 나지막한 동산이 마주했다. 장날 시장에 나가 솔가리 나무를 사 와야 했다. 학교가 끝나고 나무를 사는 일은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나무가 떨어져 당장 밥 지을 나무가 없을 때도 있었다.
친구 셋이 살고 있는 집은 우리 자취집에서 50여 m쯤 더 올라가야 했다. 사랑방처럼 안채와 떨어져 있는 방이었다. 친구들 집에 가니 그 마을에 산다는 두 남학생이 와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기는 하나 서로 쑥스러워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한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둘은 사촌 간이고, 친구들 자취집이 그중 한 명의 집이라고 했다. 남녀공학인 학교의 같은 2학년이었다.
어느 날 아침, 방문을 여니 앞동산의 마른 풀잎 위에, 나무가 떨어져 나간 경사진 붉은 흙에 하얀 서릿발이 서있다. 밤에 꽤나 추웠나 보다. 얼굴에 닿은 서늘한 기운이 상쾌했다. 부엌으로 갔다. 얼마 남지 않은 남은 나무를 닥닥 긁어 아침밥을 할 참이었다. 그런데, 낯선 나무 한단이 놓여 있었다. 뭐지? 나무단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검은 기름이 여기저기 묻은 나무판대기를 쪼갠 것들의 묶음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알 수가 없었다. 나무가 두둑하게 생겨 든든한 마음으로 쌀을 씻으러 마을 공동우물로 갔다. 조용한 분위기의 아주머니께서 우물가에 놓아두었던 콩나물시루에서 콩나물을 가지런하게 뽑아 주셨다. 콩나물기둥이 통통하고 짤막한 게 먹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맛있게 생긴 노란 콩나물 떡잎이 투명한 물기를 머금어 상큼했다. 나무도 생기고 콩나물도 생긴 운수 대통인 날이었다. 콩나물을 주신 분은 우물가 옆집에 사는 남학생의 어머니셨다. 자식과 같은 또래 아이들이다보니 아릿하셨나보다. 그 집 문간에는 키가 큰 빨간색, 하얀색의 접시꽃이 많이도 피어 있었다.
우물가 옆집에 사는 남학생이 선배언니에게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전하듯 말했다. 누군가 ‘미행’을 하니 조심하라고. 당시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미행이라는 말이 생소하였다. 평상시 우리 또래가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미행이라는 생경한 단어가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선배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언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나무를 가져다 놓았나...’ 선배언니는 왠지 나와 다른 세상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보다 많이 성숙했던 것 같다. 같이 살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웃집에 사는 친구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나중에, 우물가 집 남학생의 아버지가 철도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버지께서 철도침목 보수작업 중 교체한 낡은 침목을 가져오신 건 아닐까. 철로를 건너 다녀야 하는 등하굣길에 철로를 받치고 있는 침목을 유심이 관찰했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데다 검은 기름이 스민 모양새 등의 질감으로 보아, 우리 부엌에 놓인 나무는 철도침목을 쪼갠 나무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무는 우물가 집 남학생이 가져다 놓은 것 아닌가? 어디까지나 나 혼자 해 본 추리다. 틀리거나 맞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멍청이 다리옆으로 높고 아취까지 곁들인 멋진 다리가 생겼다. 멍청이 다리로 이어졌던 길이 구 도로가 되고, 처음 자취를 했던 집 터까지 없어진 모습을 보면, 나의 이야기 하나를 잃은 것처럼 헛헛하다. 이사하여 살았던 마을은 그대로 남아있기는 하나 이곳도 많이 변했다. 그래도 한동안 도종환 님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가 나왔을 때, 그 집의 붉은 접시꽃이 생각났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가곡 ‘그 집 앞’을 들을 때, 그 집 생각이 났다. 그 집 앞을 지날 때 자연히 고개가 돌아가 바라보아졌다. 지금은 어느 노래의 노랫말처럼 희미한 옛 그림자가 되어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의식조차 못한채 지나쳐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