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안에 나 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나기는 만난다. 그 얼마 없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특히나 그들에게서 보는 껄끄러운 모습은 내 안의 어딘가에 구부러져 있는 모습임이 분명하다.
한 사람은 좋은 영양제를 두고 그것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이렇게 돼 묻는다.
"아이가 수험생인데 모르시나요. 안 먹이세요? 집중력이 좋아져요."
아,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꽤나 위협적이다.
또 내가 만났던 한 사람은 아무리 내가 저자세로 말하고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래 무슨 수가 있을까, 맞습니다. 그대 말씀이 맞아요. 하고 뒤돌아선다.
일이 있어 들른 지인의 집은 그의 머릿속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겐 아주 소중한 물건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아기자기하고 빈 곳이 많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 다 나의 모습이라 그들이 잘 못이고 내가 잘했다, 내가 맞다는 말이 안 나온다. 나의 안에도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올바른 것, 할 수 있는 것도 나의 기준에서 생각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그들의 상황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선택에 훈수를 둘 수 없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기준이 있고 근거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이 끝까지 맞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거기까지 인 것을 이제는 안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집에 돌아와 누워서 껄끄러웠던 그 장면을 반복재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좀 다르다. 찐한 거울을 이미 난 보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의 모습으로 대치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비난하는 순간에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질려버린 경험을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만 그 순간도 고이 놓아주기로 했다.
나도 정리를 잘 못한다. 그냥 필요한 것은 어딘가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쌓아놓곤 했다. 내가 놓아둔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정리를 하고 나면 개운한다는 것을 알지만 정리가 습관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리왕인 남편과 어느 정도 조율하면서 살다 보니 한눈에 탁 트인 시야를 유지하는 것이 꽤나 좋았다. 내가 못하는 걸 해 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며 살고 있다.
내가 한순간이라도 얼굴 찌푸린 상대의 모습은 나에도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연민을 가진다. 혹은 행여나 나도 저럴 수 있지 않을까 의심해 보고 좋은 본보기로 삼는다. 나도 나를 다른 인간으로 완벽 개조할 수 없듯이, 그들도 커다란 자각을 하고 나서 조금은 바뀔지도 모른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아닌데 너의 잘못이다는 자세를 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 언젠가 마주할 당신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