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가족과 이별해야 나을 수 있는

by Min kyung



중등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업이 주는 부담감을 그대로 느꼈다. 공부를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고, 나의 실력은 그를 따라주지 못했다. 집중을 할 수도 없었다. 두통은 항상 찾아왔고 그 뒤엔 복통이 따라왔다. 여러 가지 통증이 나의 몸을 지배했다. 우울했다. 가끔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우울한 기분, 통증, 마구잡이식 식습관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정식 한의원이 아니라 집에서 의술을 하시는 분을 찾아가 머리에 한 움큼 시커먼 피를 빼냈던 기억도 난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학대를 하는 것도 아닌데. 기분은 항상 아래로 향해 있었다. 짜증이 온몸을 뒤덮었고 나쁜 에너지는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들은 항상 나에게 물었다. "넌 도대체 왜 그러냐고"


나는 그들이 나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인간을 잘 모르고 취급하거나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덮어놓고 나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많았고, 끝까지 자신의 논리가 맞다고 우기기도 했다. 부모가 가지는 권위를 아이를 윽박지르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단서에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맏이'가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깔고 있었다. 양보와 배려는 꼭 내가 몸에 착장해야 하는 덕목이었다.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아마도 모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 있었던 일, 공부, 나의 심리 상태 등.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그릇으로 나를 판단하고 평가했다. 명확한 사리분별이 생기기 전까지는 부모를 평가해 본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일이다. 엄마와 아빠가 나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평가하는 소리에도 귀를 많이 기울였었다.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학벌, 나의 소득 수준, 나의 집안 배경 등을 남의 시선으로 판단하려고 했다. 그래야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을 소득이 많지는 않아도 열심히 모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2증 빌라 건물에 2층엔 주인이 살고, 1층 방 2개인 집에 살았다.



지금 남편을 소개로 만나서 사귀면서 무엇보다도 검소하고 아끼는 습관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인생은 한방이고, 돈이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질려있었다. 엄마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결혼을 서두르고, 그 집이 크게 부자가 아니라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밤마다 나에게 여자란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교했다. 여자가 좀 기울어도 좀 있는 집으로 시집가야 된다는 논리를 매일밤 설교했다. 아주 심하게 반대하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고 오히려 황당했다. 내가 사는 집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데 그 부모가 그런 말을 한다는 심보가 속물처럼 보였다. 물론 그들은 애지중지 키운 딸이 여유롭게 인생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도 내가 살고, 우리 부모보다 낫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엄마는 10년만 살다 보면 다른 친구들이 너보다 더 잘 살 거라고 했다. 그때 분명히 너는 후회할 거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말하는 사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끼며, 계획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그래서 만약 나도 그냥 보통의 여자라면 나와 비슷한 환경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내가 엄마의 가치관대로 살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엄마 옆에는 엄마를 사랑하는 동생이 있다. 엄마의 가치관과 엄마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같이 산다. 나는 나의 기준으로 맞출 수 없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사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탈출해야 했고 그들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 내가 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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