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엄마가 거실에서 말했다.
“저기 이거 좀 도와줘. 리모컨이 또 이상해.”
나는 방에서 하던 걸 멈추고 나왔다.
리모컨은 고장도 아니었고,
버튼을 살짝 잘못 누른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깊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거 그냥 이렇게 누르면 되는 거야.
이것도 여태 몰라서 물어보면 어떻게 해”
말투는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짜증을 내고 싶어서 낸 것도 아니고,
엄마를 무시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어떤 감정이
말보다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엄마는 잠깐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작게 말했다.
“아… 맞다, 그거였지. 까먹어서 물어본 거야…”
그 짧은 대답에 엄마의 민망함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고,
그 눈빛이 내 마음을 후회로 찔렀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 입에서 나온 말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나 자신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엄마는 평소에도 나에게
큰 부탁을 해온 사람이 아니다.
집안의 무거운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고,
내가 큰딸이라고 해서 특별히 맡긴 역할도 없다.
그런데도 엄마가 작은 도움을 청할 때면
내 마음 어딘가가 먼저 경직된다.
어릴 때 나도 모르게 만들어낸
‘큰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이
아직도 내 어깨에 남아
엄마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엄마가 시킨 적도 없는데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의무감이
엄마에게 향하는 내 말투를
이렇게나 뾰족하게 만드나 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는 어김없이 늘 금방 찾아온다.
엄마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생각보다 쉽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걸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요즘은 그런 순간이 오면
내가 먼저 한 박자 늦게 말하려고 한다.
감정을 그대로 내뱉기보다
말투 하나라도 조금 더 부드럽게 내보내 보려고.
엄마는 생각보다 빨리 흔들리고,
나는 생각보다 쉽게 후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