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 나는 늘 엄마의 짐을 먼저 챙긴다.
여권은 잘 넣어두었는지, 약은 챙겼는지, 간식은 충분한지.
여행 짐은 젊고 건강한 내가 드는 게 맞다고,
엄마는 이제 무릎도 허리도 발목도 예전만 못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챙김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그런데 엄마는 이 챙김이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왜 자꾸 내 걸 네가 들려고 해.”
“노인네 취급하는 것 같잖아.”
툭 던지는 말투지만, 그 사이로 미묘한 감정이 흘렀다.
그건 ‘짜증’이라기보다 ‘불편함’에 가까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 자리를 슬며시 빼앗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하지만 나는 또 나대로 답답했다.
“아니, 이 큰 짐을 엄마가 들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
“젊고 튼튼한 내가 들면 되지. 왜 그래?”
나는 내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고,
딸인 내가 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계속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늘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너도 애 낳아봐. 그게 그렇게 되나!”
처음엔 그냥 ‘엄마 특유의 고집’으로 들렸다.
하지만 여행을 몇 번 더 다니면서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왜 엄마는 항상 그 말을 할까?
그냥 딸한테 맡기고 편하게 다녀도 되는데,
괜히 화난 사람처럼 굴고,
유독 그 말만은 힘을 실어 말하는 이유가 뭘까.
그러고 보니, 맞다.
나는 ‘내 아기’에게 돌봄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품어 길러낸 아기가 자라,
어느 날부터 나를 중심에 두고
살뜰히 챙기고, 먼저 걱정해주는
그 역전된 돌봄의 순간을
나는 아직 경험해본 적이 없다.
다 큰 어른이 되어,
이제는 아기를 키워야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나를 보며
엄마의 ‘아직도 여전히 아기 같다’는 그 마음을
나는 겪어보지 못한터라 상상으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짐을 들 때,
단순히 ‘예전 같지 않은 체력’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게 아닌 것이다.
아마도 여전히 나의 엄마로 먼저 남고 싶은 마음.
자식 앞에서 쉽게 ‘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그 자리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행길에서 엄마의 짐을 들며
조금이나마 자식의 든든함을 주고 싶었던 건데,
엄마는 같은 순간에
자신의 역할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말했던 “너도 애 낳아봐”는
생각해보면 잔소리가 아니라,
“너는 아직 모르는 마음이 있다”라는
엄마식의 조용한 고백인가보다.
그렇게 또 하나의 마음을 배워가며,
우리는 여행길을 나란히 걸었다.
여전히 엄마와 딸 사이에서,
여전히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