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굴원, 가의 이야기
절학무우..
중인희희, 여춘등대.
아독박혜, 여영아지미해.
루루혜, 약무소귀.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아독이어인이귀식모.
絶學無憂..
衆人熙熙, 如春登臺.
僂僂兮, 若無所歸.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我獨異於人而貴食母.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뭇사람들은 희희낙락하고, 봄날의 등대에 오르는 듯 하다. 지치는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들은 밝은데, 나만 홀로 어둡구나. 뭇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답답하구나. 나홀로 뭇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만물을 먹이고 살리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노자 20장)
공부를 하면 외롭다. 30-40대가 되어 공부를 하면 더 외롭다. 왜냐면 주변을 둘러보라.
주변의 사람들은 온통 부동산에, 주식에 여기 저기 투자를 하며 돈을 벌고, 또 화려하게 먹고 놀러다니며 쓰는 모습들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 홀로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심정이 '아독민민' 이다.
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한다. 왜냐고? 답은 살고 싶기 때문이다. 제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경쟁을 위한 공부, 시간 지나면 쓸모없어지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
대학에서, MBA에서 힘들게 해왔던 공부는 지금 나에게 의미가 없는 과거의 그것일 뿐이다.
그런 공부와 절교해야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노자의 "절학무우"에 담긴 뜻일 것이다.
<사기> 굴원가생 열전을 읽었다.
굴원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 회왕의 신하로서 초나라를 위해 여러 간언을 했지만 어리석은 왕은 안타깝게도 굴원을 후진 장사 지역으로 내쫓았다. 이에 굴원은 망국이 되어가는 나라의 신하로서 신세를 한탄하며 장사 지역 강가에 앉아 '굴원부'라는 글을 짓는다. 그리고는 그만 돌을 껴앉고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그의 죽음을 훗날 비슷한 상황이 된 한나라 신하 가의가 "조굴원부"라는 글을 지어 그를 애상하며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는 글을 짓는다. 그리고 더 옛날에 노자도 학문을 하면서 느껴지는 인생의 외롭고 답답함을 도덕경 20장에 “속인찰찰, 아독민민”이라는 구절에 표현했다. 자신은 왜 다른 사람처럼 봄날의 등대에 올라 희희낙낙하지 못하고 홀로 답답하게 공부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결국 노자는 “아독이어인이귀식모”라는 구절로 결론 내린다. 그래도 자신은 이 세상의 이치, 그 거대한 본질을 귀이 여긴다는 것이다. 알듯 모를 듯한 구절이지만, 나는 노자의 힘을 느낀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이후 한나라 문제 시기에 가의라는 뛰어난 신하가 있었다. 20세 어린 나이에 박사로 임명되어 한나라 건국 20여년이 된 시점에서 제후들 틈에서 나라의 기틀을 강하게 하기 위해 <치안책>과 같은 정책을 제안하며 여러 글을 지어 올린다. 하지만 당시도 보수세력인 강후 주발과 관영 등의 반대와 시기에 부딪쳐서 문제는 일단 가의를 변방 장사왕의 태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의는 장사지역으로 부임해 가면서 상수 강가에서 자신의 처지를 굴원에 빗대어 <조굴원부>라는 글을 지은 것이다. 나는 가의도 굴원처럼 비관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 그가 지은 <복조부>라는 글을 보면 가의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가 장사에 있는 어느날 집안에 우연히 날아 들어온 부엉이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묻는 시를 짓는다. 복은 부엉이를 뜻한다. 이것이 <복조부>인데, 이 글 마지막에 가의는 읊는다. “삶과 죽음은 하나요, 생에 집착하지 않으니 자신을 보존할 수 있고, 공허의 본성으로 속세에 자유롭도다“라고 말이다. 그 역시 노자철학을 암시하는 글을 짓는다.
얼마 후, 효문제는 조정 분위기를 보고 궁여지책으로 장사로 보낸 가의를 다시 조정으로 부른다. 가의는 다시 신하로서 소신있게 여러 안을 올리며 절절히 왕에게 전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효문제는 그의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의 태부로 가의를 임명하며 그를 신뢰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의는 자신이 모시는 어린 왕이 사고로 죽자 너무 괴로워하다 그만 그도 33세 나이에 죽게 된다.
아무튼 굴원과 가생은 모두 자신의 학문과 소신이 그 시대에 관철되지 못해 좌절했다. 하지만 그 둘의 결론은 다르다. 굴원은 희망없는 자신의 나라와 어쩌지 못하는 자신에 절망했지만, 가의는 복조부에서 보이듯 초연한 자세로 다시 자신의 소임에 임했다.
노자도 말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고, 자신도 고독하고 답답하다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이치를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깨우치는 학문의 길은, 그 자체로 희망이고,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