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단문
아직도 싱싱한 약관의 틀에 사는 것 같은데
멀 것만 같던 불혹 진작 지났고
지천명 유수같은 흐름도 곧 폭포수에 휩쓸리겠지만
암팡진 골산骨山 오르면서도 내 무르팍 아직 바람 새들지 않으니
맘만 달리 먹으면 나이는 오히려 방부제일 수도 있지 않겠나.
아무리 힘줘 붙든다고 손아귀에 잡힐 세월이던가.
외곬 세월 흐름이지만 유연히 편승하는 게
정중동靜中動, 자연의 무쌍한 변화마다 수용하는 심산 고봉의 모습 아니겠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어디선가 똬리 틀고 기다릴 낯선 그림자의 눈길, 무시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은 호주머니 속 보석처럼 손쉬운 점유물이 아니겠나.
그렇지 않음 귀하디 귀한 앞으로의 여정이 아이들 들뜬 소풍 길은 고사하고
지팡이에 의지한 혼돈 속 겨운 고행이 될 것 같지는 않은가.
봉우리 위 자수정처럼 부서지는 햇빛 유혹에 흠뻑 빠져
금방이라도 푸른 물 쏟아낼 듯한 녹음
수채화 병풍처럼 넓게 펼쳐진 단애
노을 검붉게 물들면 물든 대로,
자락마다 어둠 깔리면 깔린 대로
세상 움직이는 그대로 푹 빠져드세.
너른 기와집 주춧돌 되지 않았으면 어떻던가.
비록 가난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벗, 의와 정으로 굳어진 우리네 함께 하는데
시름에 붙들릴 겨를 어느 새라 있을 텐가.
모래밭 조약돌 무리에조차 끼지 못했으면 어떻던가.
보이는 것마다 바위, 딛고 걷는 길마다 옥수 흐르지 않던가.
그렇게 편안하게, 그렇게 안위하며 받아들이다 보면
가쁜 숨 몰아쉬어 세상 밝히는 일출처럼,
혹은 숨죽여야만 바라볼 서녘 황홀한 일몰처럼
어느덧 다가올 마지막 그림자마저
짜릿한 오르가슴처럼 넉넉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