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내가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출근길의 전철 안에서였다.
지하철 2호선 순환열차의 맨 앞 칸에서 그녀는 내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초춘의 싱그러운 꽃잎처럼 연한 감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온통 화사한 매력으로 내게 부각되고 말았다.
러시아워의 초만원 전철 승객으로서 꽤나 익숙해 있었는지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도 그녀는 전혀 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얄미우리만치 침착한 그녀의 모습은 스물두셋쯤 되어 보이는 외모와는 또 다르게 상당한 지성과 세련미가 엿보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아름답고 지적인 눈, 그리고 오뚝한 콧날은 누가 보더라도 사랑을 느낄 만큼 예뻤다. 콩나물시루와 진배없는 전동차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성싶었다. 어쨌든 그녀는 겨울이 남겨놓은 유일한 설화처럼 홀연히 내게 나타났다.
만일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을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가리키며 ‘바로 이 여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금세 나의 내부에서 진한 전율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 서있는 두어 명의 어깨너머로 그녀를 훔쳐보았을 때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녀가 참으로 예쁘다고 느낄수록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신림역에서 교대역까지의 일곱 구간이 평소엔 고되고 지루하게만 여겨졌는데 지금 두어 사람 건너의 그녀를 느끼면서 한 구간 한 구간이 안타까울 만치 빠르기만 했다.
교대역에서 문이 열리자 그런 안타까움은 극에 이르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쓸려 나왔지만 결코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그녀의 직장은 강남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역삼동이나 선릉, 아님 잠실 쪽일까.
사람들이 내리고, 탈 사람들이 다 탈 때까지 한 번 더 그녀를 확인하기 위해 열차 안을 기웃거리는데 잽싸게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전동차는 여지없이 교대역의 홈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동차의 꽁무니를 멍하게 바라보며 비로소 찬바람이 뺨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허탈감을 안고 홈을 빠져나오는데 내내 그녀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십여 분 일찍이 집을 나섰다. 두 번씩이나 그녀를 보았던 2호선 순환열차의 맨 앞, 첫째 칸에 설레는 기대감으로 승차했다.
전에 없던 억센 힘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그녀를 찾으려 했다. 마치 그리움에 허덕이는 이산가족처럼.
그녀가 그 칸에 보이지 않을 때는 그곳이 교대 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내렸다. 이렇게 힘차고 부지런한(?) 아침을 보낸 지 두 주일이 지나서였다.
신림역에서부터 세 구간을 헤매고 사당역에 내려서는 여느 때처럼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훔쳐냈다. 이제 그녀를 만나야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필연이었다.
만나서 제일 먼저 약속을 걸어야지. 퇴근 후에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서서히 내 여자로 만들어야지. 그러한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점철했다.
내 자신이 결혼을 목전에 둔 총각임을 새삼 인식하면서 다음 열차엔 그녀가 탔으리라고 확신했다(두 주일 이상 그 확신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임 기다리듯이 전동열차가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땀이 마를 때쯤 열차는 홈에 들어섰고 첫째 칸이 내 앞에서 스르르 멈출 때 아아!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은 환희에 탄성을 내질렀다.
빠르게 아주 빠르게 가슴이 뛰었고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바로 문 옆에서 그녀는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서있었다.
은빛 찬란한 햇빛처럼, 숨 쉬는 연홍의 생화처럼 그녀는 송윤아를 쏙 뺀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아! 두드리니까 역시 열리는구나.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이 있구나. 나는 그녀의 옆으로 바짝 붙어 서서 제일 먼저 몇 정거장이 남았나를 헤아렸다. 방배, 서초, 교대…, 세 구간….
아직 교대역까지 10여 분 가량이 남았다. 그 안에 쇼부를 봐야 한다. 우선 약속을 하고 그리고 나서 내 사람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봄빛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 어깨에 경련이 일고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쿵쿵 쾅쾅 진동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침이 마르는 안타까움과 조급증을 가누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두 구간이 지나갔다. 마지막 한 구간이 남았을 뿐이다. 그녀의 어깨는 내게 닿아서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게 하건만 그녀는 너무 멀리 있었다.
입은 단단히 굳어져서 열리기는 고사하고 손엔 왜 이렇게 땀이 배는 것인지…. 아아! 화중지병이라더니 지금이 그렇구나.
교대역을 눈앞에 두고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전동차가 덜컹하며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승객들이 앞 쪽으로 기울어지듯 쏠렸고 나도 움찔하며 그 쪽으로 밀려갔다.
내 몸이 반 쯤 그녀에게 밀착했을 때 나는 아찔한 환희를 느끼면서도 얼른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늘 침착한 그녀의 안정이 기울어지는 게 싫어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는데, 그녀의 하얗고 조그마한 손이 내 저고리 속주머니에서 막 빠져나오며 내 손에 잡히고 말았다. 내 알량한 밤색 지갑을 움켜쥔 그녀의 하얀 손이 더욱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아름답고 이지적인 그녀의 두 눈이 놀랍도록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감겨지고 말았다.
‘아아! 봄이 온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