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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순영 May 28. 2022

뒤통수를 맞는 건 이마가 깨지는 것보다 훨씬 아프다

당송시대를 돌아보다 1_ 구밀복검口蜜腹劍

여황제 측천무후가 반세기 가깝게 당나라를 통치하다가 위황후가 실권을 이어받아 전횡을 일삼자 현종은 쿠데타를 일으켜 원래대로 이李 씨 왕권을 회복하였다. 

현종은 황제에 즉위한 후 민생 안정과 나라 경제를 충실히 하며 국방도 튼튼히 하여 였으며, 국경 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그가 통치하던 시대를 ‘개원開元의 치’라 부르며 높이 칭송했다. 

그런 현종이 57세가 되던 해, 35세 연하의 양귀비를 궁내로 끌어들인 다음부터는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일가인 이임보에게 국정을 맡겼다.

황후 바로 아래 순위의 귀비가 되기 전의 양옥환은 현종의 며느리로 입궁했다. 현종은 아끼던 후궁 무혜비가 죽자 크게 상심했는데 경국지색의 미모에 시와 노래에도 능한 양옥환에게 한눈에 반해 아들의 아내를 가로챈 거였다. 

이런 이유까지 더해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게 된 이임보는 할 수 있는 악행은 죄다 동원한다. 아부에 능했으며 음험하기 그지없는 성품의 소유자로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쥐게 되자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죽였다. 

자치통감 ‘당기唐紀’에 이임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야밤에 서재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면 그다음 날 여지없이 누군가가 죽어나갔다. 대신들은 물론 황태자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재상 지위에 있는 19년 동안 천하의 대란을 일으켰으나 현종은 깨닫지 못했다. 안녹산도 이임보의 술수를 두려워해 그가 죽을 때까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말에서 구밀복검口蜜腹劍이 유래했다. 솜 속에 바늘을 숨기고 있다는 뜻의 면리장침綿裏藏針과 같은 뜻의 숙어이다.

이임보가 죽자 양귀비의 사촌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다. 


“죽어 마땅한 놈이 이제야 죽었구나.”


이임보의 죄목을 낱낱이 열거한 양국충이 현종에게 고했다. 화가 치민 현종은 이임보의 생전 관직을 모두 박탈하고 부관참시의 극형에 처했다. 

양국충도 이임보 못지않은 간신배였다. 양귀비 덕분에 재상 자리에 오른 양국충도 나라를 쥐락펴락 마음대로 주물렀다. 이임보가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 안녹산이 별러왔던 난을 일으키자 현종은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이십시오. 그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지 못한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자결을 명하고 양귀비는 나무에 목을 매 죽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사후약방문이었다. 당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그동안 현종이 쌓았던 업적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겉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로 친근감을 보이면서도 속으로 상대를 해칠 생각을 품는다는 의미의 구밀복검은 그야말로 흔히 접하는 사례의 고사 숙어이다.

마주한 자리에서와 달리 뒤돌아서면 남을 헐뜯거나 뒤통수치는 사람이 있다. 아예 그 사람이 뒤에서 했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갈 일이겠지만 비밀이란 그다지 잘 지켜지는 게 아니다. 

그런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대다수의 화두다. 어찌 그런 인물과 대화라는 걸 이어갈 수 있겠는가. 겉과 속이 다른 구밀복검처럼 뒤에서 헐뜯는 말을 절대 그 사람의 면전에서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임보처럼 두려워서가 아니라 비겁하고 치졸하여 멀리하게 된다.  






당송시대



다시 천하 통일을 이룬 수나라는 2대 황제인 양제 때 폭정으로 멸망하였다가 약간의 혼란기를 거친 후 618년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게 된다. 

수나라 왕실의 외척이자 선비족 계열의 귀족인 이연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나라 왕조의 개국을 선포하면서 당고조로 즉위한다. 

그 당시까지의 중국 역사상 가장 국력이 번성한 당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으로 발달한 제국이었다.

당나라는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유목민 중심인 북조의 수나라를 계승했기 때문에 한족문화와 유목문화가 융합한 민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반란이 거듭되면서 절도사 세력이 향상하였고 중앙정부에는 환관과 외척들의 권력다툼이 벌어지더니 결국 희종 말기에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고 만다.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다섯 개의 왕조(5대)와 화중, 화남과 화북 일부를 지배했던 열 개의 지방정권(10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오대십국이라 한다. 

5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10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세운다. 춘추시대의 송나라, 남북조시대의 송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이라 부르기도 한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이라 하며, 이후 임안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칭하며 구분하였다. 북송과 남송을 합쳐 송 왕조라고 일컫기도 한다. 송나라는 원나라에게 멸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vAIrZ0e5-U

  

https://www.bookk.co.kr/book/view/13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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