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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km 마라톤 처음 도전합니다

by 임태홍

새해 첫날 오전 7시, 벨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오늘은 10km 마라톤에 도전하는 날입니다. 2025년 새해 일출런 마라톤. 며칠 전부터 시골에서 올라와 쉬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동안 1년 동안 5km만 뛰었는데 10km는 생전 처음입니다. 10km는 1시간 이상 계속해서 달려야 하는데 괜찮을까? 부담감이 마라톤 처음 시작했을 때와 같습니다. 간단히 아침을 먹습니다. 난방이 안된 거실이 으스스합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니, 바깥 온도는 지금 -4도. 마라톤을 시작하는 오전 9시경에는 -1도, 끝나는 10시경에는 1도라고 합니다. 마라톤 뛰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두꺼운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잠바, 또 그 위에 외투를 입었습니다. 아래는 바지 안에 두꺼운 타이즈를 입었습니다. 혹시 몰라 서랍을 뒤져서 혈압약도 반조각 먹습니다. 여름부터 혈압약을 끊었는데 오늘은 추운 날씨에 10km를 뛰어야 하고, 심리적으로도 긴장을 하고 있으니 준비를 합니다.


7시 20분경 집을 나섰습니다. 우이신설선을 타고 신설동 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탑니다.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아참, 오늘은 쉬는 날이고, 정월 초하루 설날입니다. 마라톤 대회 신청을 하지 않았으면 한해를 되돌아보고 여유로운 때입니다. 그믐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약주라도 한잔 할 텐데 마라톤 때문에 긴장해서 그믐이고 설이고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12월은 계엄령에다 여객기 사고까지 겹쳐서 뉴스를 보고 가슴 졸이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최악의 한 달이었습니다.


신도림역에 내리니 벌써 8시 40분. 10km 팀 출발 시각은 9시입니다. 5km 뛸 때는 출발 순서가 10km 다음이라서 조금 지각하더라도 여유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20분 남았습니다. 마음이 급해져 계단을 뛰어 내려가 2호선으로 바꿔 타고 도림천 역으로 갑니다. 너무 늦어서 전철 안에는 마라톤 참가자들도 안 보입니다.

주머니에서 번호표를 꺼내 가슴에 달고 대회장 안내 팜프렛을 찾아봅니다. 오늘 10km 코스는 신정교 아래 육상트랙구장에서 출발하여 안양천을 따라 하류로 달려 내려가 합수부라는 곳까지 가서 돌아옵니다. 합수부? 합동수사본부인가? 계엄령이 떠올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합수부는 아마도 물이 합해지는 곳, 즉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곳을 말하겠지요. 반환점까지 5km를 가는데 도중에 오목교, 목동교, 양평교, 양화교를 지납니다. 다리가 약 1km씩 떨어져 있습니다.


도림천역에서 하차하니 10분 남았습니다. 역에서 출발선까지 8분이 걸린다는데. 급히 화장실에 들렀다가 하천아래로 뛰어 내려갑니다. 멀리 하얀 천막들이 보이고 출발선 아치가 보입니다. 10km를 뛰어야 하니 힘을 아껴야 하는데, 출발 전부터 힘을 너무 뺐습니다.


광장으로 달려들어가 탈의실을 찾았습니다. 윗옷과 바지를 급히 벗어 비닐에 넣어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출발지로 달려갑니다. 정확히 9시. 곧 출발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정도되는 여자아이가 대열에 서서 준비하고 있는 아빠에게 외칩니다. "아빠, 잘 달리고 와!" 날씨가 추워서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외치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멀리 하늘 위로 구름이 떠 있고 그 사이로 비추는 을사년 새해 아침의 햇살이 아름답습니다.



맨 앞줄 사람들은 이제 막 출발을 했습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가다 보니 5km 달리는 사람들과 섞였습니다. 급히 빠져나가 10km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출발선을 통과합니다. 육상 운동장을 빙 돌아 하천 쪽으로 나가니 4m 정도 넓이의 자전거도로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 듯이 달립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급하게 달렸더니 몸이 풀렸는지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 정도 속도로 계속 달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방 다리 하나를 지났습니다. 오목교입니다.


빨리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조금 빠지니 사람들 간격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시간 넘게 달릴 것을 생각하니 기가 죽습니다. 걱정과는 상관없이 다리는 평소 하는 대로 알아서 달립니다. 몸이 조금씩 풀리면서 달궈지니 겨울 공기가 시원합니다. 위에 두꺼운 셔츠를 입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입었습니다. 역시 10km 달리는 사람들은 속도가 빠릅니다. 뒤쪽에서 사람들이 부지런히 나와서 느리게 달리는 저를 추월해 갑니다. 오늘은 처음이니 힘들면 걸어야겠습니다.


강변을 따라 버드나무와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흐드러진 버드나무 가지가 여유롭습니다. 이어서 꼿꼿하게 하늘 높이 서 있는 미루나무가 나타납니다. 버드나무, 미루나무, 버드나무, 미루나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종류의 나무들이 교대로 서 있는 것이 멋있습니다. 저 멀리 다리(목동교)가 보입니다.


우선 저 다리를 목표 삼아 달려야겠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보이던 다리가 달리다 보니 다시 멀어졌다가 또 가깝게 보입니다. 왜 그럴까. 달리는 길이 구불구불하니 각도에 따라 다리가 가깝게 보였다가 멀리 보였다가 합니다. 벌써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너편 도로 한쪽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행렬이 만들어졌습니다. 10km 뛰는 사람들일까? 번호표를 보니 5천 번 대입니다. 그럼 5km를 뛰는 사람들입니다. 벌써 2.5km 반환점을 돌고 뛰어오는 것입니다.


좀 더 가니 식수대가 나옵니다. 잠시 멈춰 서서 물을 들고 천천히 마시면서 걷습니다. 물이 차갑습니다. 천변 한쪽 길을 산보하듯이 걸어가다가 다시 뜁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5km 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식수대입니다. 조금 더 가면 2.5km 반환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걷다가 다시 뛰려고 하니 새삼스럽습니다. 어쩐지 힘이 더 들어갑니다. 다음부터는 걷지 말고 천천히라도 계속 뛰어야겠습니다. 역시 마라톤은 무조건 끝까지 계속 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걷다 뛰다 걷다 뛰다 그러면 더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갑자기 배가 울렁거리고 불편해졌습니다. 아침에 뭘 먹었지? 생각해 보니 딸이 남긴 동지죽 반그릇을 먹었습니다. 거기다 찬물을 많이 마셨습니다. 배에 손을 얹고 한참을 달려 목동교를 지났습니다. 하천 건너편에 이대 목동병원 간판이 크게 눈에 들어옵니다.


2.5km 반환점에서 10km 달리는 사람들은 한쪽 길로 안내를 받아 계속 달립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7.5km. 반환점까지는 2.5km 남았습니다. 다리 2개만 더 달리면 됩니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바람이 거의 없습니다. 공기가 차갑지 않으니 목과 머리에서 땀이 납니다. 소매를 조금 걷고 손바닥을 쫙 펴서 달리며 온도를 내립니다. 사람들 간격이 많이 멀어졌습니다. 10km 달리는 사람들 중에는 벌써 5km 반환점을 돌아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앞서서 6살 정도 먹은 어린애가 엄마와 함께 걸어갑니다. 걷는 폼이 너무 의젓합니다. 지나치면서 뒤돌아 보니 배번호가 105*번 입니다. 10km를 뛰는 대단한 어린이입니다. 궁금해서, 계속 걸어가나 또 돌아보니 이제는 그럴듯하게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폼을 잡고 뛰고 있습니다. 그 옆에서 엄마도 같이 뜁니다. 앞에서 달리던 여성이 남자 친구에서 외칩니다. "다 왔어. 저기가 반환점이야! 아니, 여기야. 여기지." 아직 500m 이상은 남은 것 같은데 다 왔다고 합니다. 10km는 역시 거리의 차원이 다릅니다. 500m 정도 거리는 다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파이팅! 1344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반환점에서 안내를 하던 사람이 인사를 합니다. 누구한테 그러지? 1344번? 번호표를 내려다보니 제 번호입니다.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이곳이 합수부라는 곳입니다. 안양천 물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곳입니다. 5km를 뛰고 나니 또 5km가 남았습니다. '그렇지. 이제부터 시작이다.' 몸을 잘 풀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힘내서 뜁니다. 그런데 엉덩이 관절 양쪽이 불편합니다. 속도를 조금 늦춰봅니다. 그래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달리던 여성이 "바나나가 먹고 싶다."라고 합니다. "지금 바나나 먹으면 안 좋아." 같이 달리는 남자가 말합니다. '무슨 말이지? 바나나를 주머니에 넣어 왔나?' 그런데 달리면서 보니 저 멀리 앞에 식수대가 보이고 그 사이에 종이 박스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바나나를 나눠주는 모양입니다. 식수대 앞에 가까이 가서 보니 2cm 정도씩 조각낸 바나나도 있고 1/4 조각의 초코파이도 있습니다. 급히 물을 마시고 바나나와 초코파이 하나 씩 들고 또 뜁니다. 이것들을 천천히 다 먹고 나면 1km 정도는 줄어들겠지.


천천히 천천히 느긋하게 뛰니 지치지는 않는데 엉덩이 관절이 여전히 불편합니다. 안내봉을 들고 있는 안내원이 외칩니다. "좋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만 보고 달리니 고맙다는 대꾸도 못하고 지나칩니다. 새해 일출런을 달리다 보니 새해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은퇴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사니 이렇게 인사 받는 것도 드뭅니다. 해는 더 높이 떴습니다. 구름은 걷히기는 했는데 여전히 흐릿한 날씨입니다. 간간히 하얀 억새풀이 보이고 그 사이로 하천의 물결이 반짝입니다.


멀리 하늘 위해서 까치 한 마리가 빙 돌아 버드나무 아래로 내려옵니다. 더 뛰어가다 보니 까치들이 하천 옆에 많이 모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까치들의 설날이었습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 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그런데 안양천 건너편 도로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합니다. 구급차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급한 환자가 생겼을까. 하천을 달리면서 들으니 사이렌 소리가 하천의 양쪽 언덕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려 퍼집니다. 혹시 나이 많은 노인일까? 가족들에게 새해 인사를 받고 갑자기 위급하게 되었을까? 사이렌 소리가 한참 울리더니 높이 솟은 건물들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달리다 보니 또 식수대가 나타났습니다. 또 물을 마시고 간식을 집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초코파이와 바나나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또 몇 백 미터는 줄어들겠지. 앞서 달리던 여성이 춤을 추며 달립니다. 경쾌한 모습이 덩달아 흥겨워집니다. 귀에는 헤드폰을 끼고 말총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사뿐사뿐 뜁니다. 손가락을 가끔씩 위아래 좌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마도 박자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나도 다음부터는 저렇게 노래를 들으면서 뛸까? 20곡 정도 들으면 1시간이 후딱 지나가겠지. 좋아하는 곡 한곡만 계속 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머나먼 10km 길. 아직도 3km나 남았습니다.


어떤 외국 아주머니는 휴대폰으로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달립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데 베트남어일까 태국어일까? 아니면 필리핀어? 전화기 너머로 가족들이 교대로 응원을 합니다. 좀 더 가니 이제는 고등학교 여학생인듯한 아가씨들이 달리면서 역시 화상통화로 친구와 대화를 합니다.


"얼마나 남았어?" 전화기 너머로 친구가 물어봅니다.

"2.5km 정도....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그래 파이팅!"

"너무 힘들어!" 같이 달리는 다른 친구가 크게 외칩니다.

"무리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을게."


멀리서 노랫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그 소리가 반갑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달리면 몸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말이 하천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웃으면서 헤어져요.

다음에 또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져요."


왜 이런 노래가 들리지? 달리면서 보니까 게이트볼장 회원들이 헤어지는 시간입니다. 삼삼 오오 모여서 가방에 짐을 넣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많고 분위기가 좋습니다. 마라톤에는 이런 분위기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을 불러 같이 달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혼자서 달립니다. 혼자 달리고 혼자 즐거워하는 운동입니다. 아니 즐거워한다기보다는 그냥 혼자서 정신 수양을 하는 운동이 마라톤입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과 싸우면서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운동. 친구들과 같이 달려도 결국은 혼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그런 운동입니다.


엉덩이 관절이 뻐그덕 거립니다. 같은 자세로 한 시간 가까이 이렇게 달리고 있으니 무리가 안 갈 수 없습니다. 자세를 바꿔볼까? 뒤로 돌아서 뛰어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이제는 땅만 보고 달립니다. 땅을 보고 달리니, 마음이 훨씬 편합니다. 하얀 페인트 선이 빠르게 뒤로 지나갑니다. 속도감이 있습니다. 진즉 이렇게 달릴걸. 몸을 낮추고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계속 달립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멀리 운동장이 보이고 골인 아치가 보입니다.


마지막 스퍼트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빨리 달리고 싶은 의욕도 없고 의지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느리게 느리게 땅만 보고 달립니다. 50m쯤 남았습니다. 혼자서 결승선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데 진행 요원 한 사람이 달려 나와 격려인사를 합니다. "다 왔습니다. 축하해요. 선배님!" '할아버님'이라는 말 보다 100배 듣기 좋은 말입니다. 드디어 골인. 전광판 시계는 1시간 17분을 보여줍니다.(나중에 인터넷으로 제 기록을 검색해 보니 1시간 16분이었습니다.) 10km 첫 기록입니다. 여성 안내원이 외칩니다.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이 굳었는지 열리지 않아 고맙다는 눈인사만 합니다.


물과 캔 음료수 그리고 컵 떡국을 받았습니다. 뜨거운 물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먹어야겠습니다. 5km 뛰고 들어올 때는 대회장에 같이 들어오는 5km 참가자들도 많고 10km 참가자들도 계속해서 도착하여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는데 10km 뛰고 들어오니, 그것도 1시간 훨씬 넘게 뛰고 들어오니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 썰렁합니다. 저도 부지런히 귀갓길에 오릅니다. 새해 첫날 엉덩이 관절이 아직도 뻐근 뻐근하지만 큰 일을 했습니다. 10km를 달렸다니 꿈만 같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10km. 정말로 멀고도 먼 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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