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도 벌써 중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15일, 일요일 오전 6시 10분.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으로 날씨를 봅니다. 오늘은 여의도에서 마라톤 대회가 있는 날. 현재 기온은 21도, 최고 기온은 30도, 강수 확률은 0%. 한창 달릴 시간인 9시에서 10시 사이는 23도까지 오르고 구름이 많이 낀 날씨가 된다고 합니다. 달리기는 좋을 것 같습니다.
여의도 공원 문화마당에서 열리는 대회 이름은 긍정의 힘 마라톤대회. 참가비는 5만 원으로 다른 대회보다 조금 비쌉니다. 긍정의 힘? 이름이 특이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영어로 'Power of Positivity' 마라톤입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많이 사용하는 표현 같은데, 아무래도 입에 달라붙지 않습니다.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긴다는 뜻이겠지요. 떡 두 조각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배낭에 반바지 하나를 넣고 출발합니다.
5호선 여의도 역에 내려서 문화마당 광장에 도착하니 8시가 되었습니다. 마라톤은 9시에 출발하니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먼저 대회본부 쪽으로 가서 배번호와 기념품을 받습니다. 저는 원래 6월 22일에 열리는 람사르습지 밤섬런 마라톤대회를 신청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회가 취소가 되어 이 대회에 신청해, 집에서 배번호를 받지 못하고 현장에 나와 수령합니다. 탈의하는 곳을 찾아 옷을 갈아입고 물품 보관소로 가니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됩니다. 짐을 맡기고 나니 벌써 8시 45분.
온도를 보니 20도로 높지 않은데 햇빛은 점점 더 따가워집니다. 광장 안쪽으로 들어가 출발하는 곳을 찾고 있는데 경찰차가 두 대나 들어와 방송을 합니다. "오늘 마라톤 대회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대회는 허가받지 않은 대회입니다." 깜짝 놀라 다가가서 물어보니 주최 측에서 미리 경찰 협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라톤 코스가 봉쇄된다고 합니다. 아니 수천 명이 모이는 대회인데 이럴 수가? 대회본부 쪽으로 가보니 항의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오늘 취소되면 어쩌지? 혼자라도 달려야 하나? 그런데 마라톤 구간을 경찰이 막고 있다고 하니 달릴 수나 있을까? 아니면 집까지 걸어서 귀가를 할까? 여의도에서 정릉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 걸릴까? 검색을 해보니 거리가 겨우 10km 정도입니다. 아니 이렇게 가깝나? 지하철을 타도 거의 1시간 코스인데. 놀랐습니다. 달리면 1시간, 걸으면 2시간 거리라니.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대회 본부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옵니다. 괜한 고민이었습니다.
출발 아치가 보이는 쪽으로 급히 들어갑니다. 출발선 부근에는 벌써 사람들이 꽉 차 있습니다. 하프팀이 출발 준비를 합니다. 어떤 여성이 옆에 서 있다가 묻습니다.
"마라톤 얼마나 달리셨어요?"
"2년 정도 됐는데요."
"저는 20대 때 조금 달리다가 10년이 넘어서 이제 처음 나왔어요."
"그래요? 젊었을 때 달리셨다면 잘 달리시겠네요."
"아니요. 오늘 완주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오랜만에 뛰니."
"하하. 이 대회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우연히 광고를 보고요."
"혹시 '마라톤 온라인'이라는 사이트 아세요?"
"아니요."
"저는 매달 한 번씩 뛰는데. 그 사이트에는 마라톤 대회 일정이 다 나와있어요.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마라톤 정보가 다 나와 있어서 정말 도움이 돼요."
9시가 되어 하프팀이 출발했습니다. 저도 10km 줄을 찾아 출발 준비를 합니다. 이번에는 가능하면 앞 쪽에서 달려야겠습니다. 10km 팀이 출발합니다. 러너들이 달리는 좌우로 사람들이 늘어서서 박수를 칩니다. '파이팅' 소리도 들립니다. 공원 안에는 휴일이라 그런지 놀러 나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수막들이 양쪽으로 많이 걸려 있는데 두 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이 달리는 한, 희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걸음이 내일의 기적이 됩니다." 달릴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이 멈출 수는 없겠지요. 내일의 기적이란 내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병들고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건강함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람들의 파이팅 소리를 들으며 힘차게 뛰어 나갑니다.
여의도 공원 안쪽의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가 길가로 내려갑니다. 잘 포장된 작은 도로입니다. 달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니 어떤 사람들은 인도 쪽으로 다시 올라가 달립니다. 왼쪽으로는 산업은행 본점 건물이 보입니다. 10층 정도되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달립니다. 조금 있으니 또 비슷한 높이의 KDB캐피털 건물이 나타납니다. 그대로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건물 꼭대기층을 보며 달립니다. 꼭대기에는 건물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그 위 푸른 하늘에 솜털 같은 구름들이 가득 깔려있습니다.
참가자들은 거의가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입니다. 민소매 셔츠를 입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달리면서 천천히 몸을 풀어봅니다. 마라토너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마치 썰물 빠지듯이 한강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도로 옆의 높은 나무 아래 그늘이 시원합니다. 유월의 아침 햇살이 부드럽습니다. 한강 쪽으로 계속 달려 나가니 왼쪽으로 한국수출입은행 건물이 나오고 또 다른 건물들이 줄줄이 나타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갑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천천히 달립니다.
왼편에 있는 조그만 파출소 건물을 지나 좀더 달려가니 작은 터널이 나타납니다. 토끼굴이라는 한강 나들목입니다. 오늘 10km 코스는 여의도 공원에서 출발하여 국회의사당을 한 바퀴 도는 줄 알았는데 한강 쪽으로 내려갑니다. 한강변을 달리는 모양입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니 뛰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오니 넓은 광장이 나타납니다. 큰 나무들 사이에서 왼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립니다. 출발한 지 7분 정도 되었습니다.
오늘도 목표는 천천히 지치지 않고 달리기, 걷지 않고 달리기입니다. 달리는 공간이 넓어져서 좋으나 도로 양쪽의 나무들 키가 작아 그늘이 없습니다. 햇빛은 점점 뜨거워집니다. 멀리 서강대교가 보입니다. 달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도로의 차선을 내려다보면서 달립니다. 한참을 달려서 서강대교를 아래를 지나니 높이 선 미루나무들이 반깁니다. 안내하는 사람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칩니다. "파이팅! 파이팅!" 그 소리를 들으니 다리 근육에 힘이 들어갑니다. 아직은 지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얼마나 달렸을까? 한강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여의도수난구조대 건물을 지나니 2km 안내 간판이 보입니다. 이제 3km만 가면 반환점입니다. 500m쯤 더 가니 식수대가 나왔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다시 달립니다.
왼쪽으로 주차장의 차들이 보이고 멀리 국회의사당 건물과 둥근 돔이 보입니다. 하늘은 구름이 더욱더 엷어져 파랗게 변했습니다. 햇빛은 더 따가워졌습니다. 물빛광장에서 출발하는 다른 대회 때라면 이곳은 아직 코스 초반인데 벌써 2km 넘게 달렸습니다. 다리가 무거워집니다. 둔치 주차장을 왼쪽으로 끼고, 사뿐사뿐 최대한 힘을 아껴서 달립니다. 도로 한쪽에서 사이클도 달립니다. 2차선의 자전거 도로 끝에 작은 터널이 보입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이 시원합니다. 터널 바깥으로 나가니 좁은 길 가에 잡초들이 무성합니다. 키 작은 관목 아래에 하얀 꽃, 노란 꽃이 줄지어 피어있습니다. 멀리 미루나무가 솟아있습니다. 샛강을 가로질러 구름다리를 건넙니다. 빽빽이 우거진 사철나무 아래에 3km 표지판이 서있습니다. 앞으로 2km만 더 가면 반환점. 벌써 지쳐서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리는 코스는 한강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하얀 꽃이 무성한 잡초밭 너머로 버드나무가 보이고 멀리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가 보입니다. 양화대교입니다. 그 너머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이 서 있습니다. 응급환자 이송 차량이 강변 한쪽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펼쳐진 한강을 바라보면서 계속 달립니다. 하나 둘, 하나 둘, 발을 맞추고 호흡을 맞춥니다. 왼쪽으로 작은 나들목이 보이고, 조금 지나니 전철이 달리는 철교 아래입니다. 반대쪽 도로에는 벌써 반환점을 돌아온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니 안내요원들이 중간에 서서 사람들 교통정리를 합니다. 그 사이를 사이클 타는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햇빛은 더 뜨거워졌습니다. 안내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더위를 이기라고 커다랗게 소리를 지릅니다. '파이팅', '파이팅.' 마라톤 대회를 여러번 참가했지만 이렇게 안내자들이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달리면서 티 셔츠의 목 지퍼를 열어 땀을 식힙니다. 어깨 파인 나시를 입은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무릎까지 내려온 반바지를 입었는데 다음에는 더 짧은 바지를 입어야겠습니다. 양화대교 아래로 들어가니 그늘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다리 아래를 벗어나니 멀리 미루나무가 보이고 그 위에 뭉게구름이 떠 있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앞으로 1km 정도는 더가야 반환점이 나옵니다. 더위에 지쳐서 걷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을 추월해서 계속 달립니다. 어떤 엄마는 달리면서 유모차를 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는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남성 마라토너도 보았습니다.
명자나무 관목이 길게 우거진 곳을 지납니다. 붉은색 새순이 자라고 있습니다. 멀리 큰 나무들 아래는 시원한 그늘이 많지만 달리는 도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뜨거운 햇빛이 바로 내리쬡니다. 이미 반환점을 돌아온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걷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선유도 육교 아래를 달립니다. 조금 지나니 급수대가 나옵니다. 미리부터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어가 물을 한 컵 집어 마시고 또 한 컵, 시원한 물을 마시고 다시 달립니다. "10km 도세요. 10km 도세요." 안내요원이 외칩니다. 5km 반환점을 돕니다. 이곳은 성산대교 근방입니다.
반대쪽 차선에는 반환점을 향해서 뛰어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보다 더 뒤에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위에 지쳐서 힘들게 걸어오는 사람, 땀을 많이 흘리면서 달리는 사람, 커다란 안면 마스크로 햇빛을 가린 사람, 더운데 팔다리에 온몸에 보호 밴드를 착용한 사람도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거워진 두 발을 부지런히 교차하며 달립니다. 도로 바닥의 차선을 따라갑니다. 앞으로 4km.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됩니다.
도로 위는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졌습니다. 아침의 일기예보에는 이때쯤 시간에 날씨가 흐리다고 했는데 그 반대입니다. 화창한 여름날, 지친 사람들이 길가 한쪽으로 비켜서 줄줄이 걸어갑니다. 앞서 달리는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말합니다. "천천히 좀 달려요. 조금 있다가 또 걸을 거잖아." 남자는 달리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걷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족은 모두 함께 지쳤는지 작은 아이를 앞세우고 나란히 걸어갑니다. 진행요원들이 커다란 소리로 파이팅을 외칩니다. 그 목소리에 힘이 났으나 속도는 빨라지지 않고, 발걸음은 그대로입니다. 오늘은 유독 걷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뜨거운 날씨 탓입니다. 선유도 부근을 지났습니다. 하늘 높이 서 있는 미루나무 꼭대기에 붉은 태양이 걸려있습니다.
달리다 보니 도로 옆 그늘 아래에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있습니다. 참가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또 가다 보니 어떤 사람은 도로 옆 나무 그늘 아래에서 주저앉아 있습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토끼굴 나들목으로 들어갑니다. "다 왔습니다. 힘내세요." 안내요원들이 외칩니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 나오는 노래, 가호의 '시작'입니다. "다시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내 전부를 걸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가질 거야. 그게 바로 내 꿈일 테니까. 변한 건 없어 버티고 버텨. 내 꿈은 더 단단해질 테니. 다시 시작해. 아아아아 아아아아." 안내요원들이 커다란 스피커를 토끼굴 안으로 가져와 노래를 크게 틀어놨습니다. 그 노래에 맞추어 달리다 보니 어느덧 긴 터널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오른쪽으로 여의도 파출소가 보입니다. 공원 쪽 도로로 달려 들어갑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이 반갑습니다. 이제 조금씩 속도를 올려봅니다. 그런데 공원 안쪽 곳곳, 나무 그늘 아래에 참가자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닥에 굴렀는지 모래 범벅이 되어서 수돗가에 앉아 있습니다. 광장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가 급히 출동하여 나들목 터널 쪽으로 달려갑니다. 겁이 나서 달리는 속도를 줄입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쓰러지지 않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 이미 충분히 무리를 했습니다. "파이팅! 파이팅!" 자원봉사자들의 응원소리를 들으며 골인을 했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나눠 주는 대로 급히 걸어갑니다. 한 병 마시고 또 한병 더 받아 마십니다. 기념품과 메달을 받고, 맡겨 놓은 가방을 찾아 광장 한쪽에 주저앉아 빵을 먹고 있는데 문자가 옵니다.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임태홍 님 기록은 01:19:58.48입니다." 1시간 20분 가까이 달렸습니다. 링크로 알려 온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출발 시간은 9시 6분 16초, 도착시간은 10시 26분 14초입니다. 10km 전체 순위는 참가자 3606명 중 2530등. 남자만 보면 2525명 중 1896등입니다. 제 앞에 2천 명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제 뒤에도 600명 넘는 사람들이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맨 뒤에서 달리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끝까지 달릴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앞서서 가는 사람이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아. 시원한 냉면 먹어야지." 저도 오늘은 동네 냉면집으로 가야겠습니다. 정릉 시장 부근 음식점에서 여름 특선 반값 할인행사를 하는데, 12,000 원하는 코다리냉면이 6천 원입니다.
여의도 광장을 벗어나 지하철을 타러 갑니다. 가는 길 옆 화단에 여름 꽃의 여왕, 수국이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6월과 7월 사이에 피는 수국. 이제 정말 여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토요일, 21일은 하지입니다. 여름(夏)이 도착했다(至)는 하지.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고 그래서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은 가장 짧은 날. 뜨거운 여름 유월의 마라톤 대회, 수국 사진과 함께 좋은 추억으로 새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