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에 빠진 고라니 일병 구하기

by 임태홍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납니다. 1998년에 발표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깜짝 놀란 점이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가족은 미국 아이오와주 시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들 네 명이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모두 참전을 하여 네 형제 중 세 명이 전쟁터에서 사망합니다. 라이언은 막내로 혼자 살아남아 어딘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육군참모총장은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남은 막내만이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자고 결정을 내려 라이언 일병을 찾으러 구조팀을 보냅니다. 영화는 라이언 일병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제가 놀란 것은 미국 영화인데 가족을 중요시한다는 점입니다. 미국인들은 보통 가족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고 들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서양인들도 가족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작전을 나간 군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로에 빠진 새끼 고라니 이야기입니다. 2025년 6월 18일. 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여름.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집 앞 수로에 뭔가 이상한 것이 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새끼 고라니가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저렇게 있을까? 죽어가는 고라니일까? 눈이 말똥말똥한 것을 보면 곧 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로는 그렇게 크지 않고, 깊이는 성인 무릎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입니다.


고라니 등에 하얀 점들이 보입니다. 이 점들은 태어난 지 3개월쯤 되면 없어진다고 합니다. 숲 속에서 숨어서 조용히 앉아 있는 새끼 고라니를 보게되면 조그마한 개망초 꽃들이 줄줄이 피어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것 같습니다. 이런 꽃이 많이 피는 5월 6월이 고라니 새끼들이 태어날 때이니 기막힌 위장술입니다.


이 새끼 고라니는 그러므로 아직 3개월이 안된 아기입니다. 수로로 내려가 조용히 다가갑니다.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고라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데 일어서는 모습이 어설픕니다. 강아지들 보다는 두 배 정도 더 긴 다리가 그렇게 불편할 수 없습니다. 겨우 일어서더니 뒤뚱뒤뚱 돌아서서 도망갑니다. 수로 끝은 컴컴한 지하로 이어지는데, 그곳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어두운 그 길을 100m쯤 더 내려가면 높이 1m, 폭 1m 정도 되는 커다란 수로가 나옵니다. 그곳의 수로 벽은 더욱더 높아 다 큰 고라니도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수로 주변에서 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도망가는 고라니를 쳐다보며 웃습니다. 아마도 이 아기 고라니는 아침 일찍부터 그곳에 있었고, 공사 인부들도 그 고라니를 구해주려고 시도했는데 그렇게 도망가 숨어 있다가 다시 돌아와 그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수로를 살펴보았습니다. 고라니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습니다. 고라니는 달릴 때는 빠르나 높은 곳으로 점프하는 능력은 없는 모양입니다. 긴 다리가 그 점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햇빛이 내리쬐는 그곳에 그저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엄마, 아빠 고라니가 나타나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이 수로에는 가끔 뱀이 나타납니다. 오른쪽 사진은 그보다 며칠 뒤에 찍은 사진인데 꽃뱀이라 불리는 독사 유혈목이입니다. 길이는 80cm 정도로 동작이 빠릅니다. 새끼 고라니가 이 유혈목이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위험하겠지요. 걱정되지만 고라니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도 아침에 지나가다가 수로를 살펴봤습니다. 고라니는 여전히 한쪽에 앉아있습니다. 이번에는 차가운 물을 피해서 물이 없는 곳, 그리고 그늘진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낮에는 일이 있어 그냥 지나쳤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고라니는 한쪽에 앉아있습니다.


수로의 한쪽을 막아야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플라스틱 상자가 보입니다. 그것을 수로 상류 쪽으로 가져가 막았습니다. 상류 쪽도 토관이 있어 100m 넘는 캄캄한 지하로 이어집니다. 그곳을 막아 그 안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부터 고라니를 몰아갑니다.



공포에 질린 고라니가 소리를 빼액 빼액, 으악 으악 지르기 시작합니다. 누가 들으면 동물학대하는 줄 알겠습니다. 꼭 학대당하는 동물의 울음소리입니다. 고라니 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빽빽, 으악 으악 정내미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상자를 딛고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다리 구조가 정교하지 못해서 그런지 도무지 위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고양이나 강아지라면 점프 한 번으로 이곳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고라니의 긴 다리는 도무지 서툽니다. 결국 제 두 손으로 그 작은 몸을 꼭 붙들어,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야생 동물을 손으로 붙잡은 것은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급히 수로 바깥으로 던지니, 고라니는 날렵한 동작으로 자세를 바로 잡고 도망갑니다. 그러면서 연신 삐액, 삐액, 으액, 으액 거립니다.



고라니가 도망간 곳은 수로 옆에 있는 텃밭입니다. 이 텃밭 주인은 유독 고라니를 싫어해서 사방을 녹색 그물망으로 꽁꽁 둘러쳤습니다. 그런데 고라니는 앞이 안 보이는지 그 텃밭으로 들어가려고 그물에 머리를 자꾸 들이밉니다. 자꾸 들이미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고라니는 태어날 때는 시력이 거의 없고 2개월 정도 되어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 커서도 고라니 시력은 문제가 있습니다. 눈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데 어려움이 있으며, 움직이지 않은 고정된 물체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저렇게 그물망에 계속해서 머리를 디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라니는 어쩌다 이 수로에 빠졌을까? 고라니는 대개 10년에서 12년 정도 사는데, 5, 6개월만 되면 새끼를 낳을 수 있답니다. 고라니는 10월부터 2월까지 사이에 번식기를 가지며, 보통 6개월 정도의 임신기간을 거친 뒤에 다음 해 5월이나 6월에 태어납니다.(주1) 새끼는 2마리에서 5마리 정도 낳는데,(주2) 엄마 고라니는 새끼들을 모아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숨겨 놓고 돌아가면서 젖을 주고 키웁니다. 그리고 생후 6개월 정도가 되면 시력도 완전히 발달하여 스스로 독립하여 먹이를 찾아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라니는 엄마 고라니가 무슨 사고를 당해서 집을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고라니가 가장 많은 나라로 45만 마리, 혹은 70만 마리가 산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그다음으로 많은 고라니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1/10입니다. 그리고 영국에 중국에서 수입해 사는 고라니가 조금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고라니가 수만 마리입니다. 2016년 연구에 따르면 고라니 로드킬 숫자가 연간 최소 6만 건 이상으로 추정되었습니다.(주 3) 그리고 사냥으로 죽는 고라니도 10만 마리 정도 됩니다.(주 4) 또 1만 마리 정도는 담비에게 잡아 먹힌다고 합니다.(주 5) 그러니 고라니 생존율이 그렇게 높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충남야생동물 구조센터의 보고에 따르면, 구조 후에 방생되는 고라니 중 80% 이상이 80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고 합니다.(주6) 여름에 태어난 고라니가 다음해 봄까지 살아남는 확률을 25%가 안된다고 합니다.(주7)


이 아기 고라니는 엄마 고라니가 자기를 찾아와 젖을 주지 않으니 혼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수로에 빠졌을 것 같습니다. 엄마 고라니는 보통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새끼 고라니는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숲 속에 숨겨놓고 키우지요. 그런데 고라니 집은 정해진 곳이 없습니다. 먹이를 찾아다니다 날이 지면 숨기 좋은 장소에 앉아서 조용히 쉽니다. 고라니들은 대개 혼자서 살아가거나 넓은 범위에서 엄마 고라니를 중심으로 함께 살기도 합니다. 그러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이성 친구를 찾아 나섭니다. 그때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아기를 낳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까지 아마도 고라니 부부는 추운 겨울 내내 서로의 온기를 같이 하며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EBS다큐를 보면 한겨울에 민가 한쪽 눈 속에서 함께 있던 고라니 부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암컷 고라니는 먹이를 못 먹어 기력이 다해 죽고 그 옆에 수컷 고라니가 지키고 있었습니다.(주8) 아마도 암컷 고라니 뱃속에는 새끼 고라니가 2, 3마리 자라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보내고 나면 엄마가 나무 뿌리며 새싹을 실컷 먹고 다시 기력을 회복해 봄을 넘기다 보면 늦은 봄 5월이나 6월에 새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라니는 사슴과에 속한 동물로 노루와 같은 종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인데, 우리나라에만 고라니가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 호랑이, 표범 등 큰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육식 동물이 많이 없다고 해서 고라니가 많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육식 동물이 없는 다른 나라도 고라니가 많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라니가 이 땅의 환경에 잘 적응했다는 것이고 그 점은 대한민국 국민들과도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성격과 어쩐지 닮아 있을 것 같은 고라니입니다. 우리의 성정, 즉 본성과 감정도 닮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무쌍한 기후와 높은 산, 험한 계곡, 들판, 그리고 강과 호수를 누비며 수 천년을 같이 살았으니 뭔가 닮아도 많이 닮았을 것 같습니다. 고라니 먹이는 풀, 나뭇잎, 나무껍질 등인데 특히 쑥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고춧잎이나 상추, 과일을 또 좋아해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몹시 싫어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고라니도 환경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해서 천대시할 것이 아니라, 많이 있을 때 귀한 줄 알아야겠습니다. 시골길을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고라니와 만나게 됩니다. 고라니는 초식동물이라 그런지 사람에게 잘 달려들지 않습니다. 다 큰 고라니는 몸길이가 1m 정도 되고, 급히 뛰어갈 때 보폭은 5∼6m 정도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저 멀리서도 미리 알아보고 부리나케 도망갑니다. 조용한 시골의 경치가 역동적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고라니가 재빠르게 방향을 바꿔서 논밭 사이를 질주하는 모습은 제 몸속에 새겨져 있는 고대 조상들의 기억을 일깨워줍니다. 활을 들고, 창을 들고, 그리고 돌멩이를 집어 들고 짐승 뒤를 쫓던 조상들이 저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주1) 김성수, 태화강 고라니 출산 관찰기’, 울산제일일보, 2018.6.24.

주2) 박기인, 고라니, <디지털부안문화대전>, 참조 : 2025.7.11.

주3) 최태영, 「우리나라의 고라니 로드킬 발생건수 추정」, Ecology and Resilient Infrastructure 3(3), 2016.

주4) 정수근, 「대표적 로드킬 동물 고라니가 국제적 멸종위기종?」, <오마이뉴스>, 2018.02.17.

주5)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고라니 12-585의 야생복귀, 그리고...」, 2012.12.28.


주7)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번식기... 흥분한 고라니들...」, 2013.1.16.

주8) <EBS다큐>, 폭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해 배가 너무 고팠던 고라니 부부의 최후, 201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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