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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하러 온 생명체

본격 내 고양이 자랑 글

by 시원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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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남색 암막 커튼 때문인지 희미해진 정신 때문인지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어느 날이었다. 

뜨거워진 이마와 축 늘어진 몸으로 침대 위에 겨우 붙어 있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허리에 돌덩이를 매달아 둔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기척이 느껴졌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곤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끈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정확히는 두드림과 쓰담쓰담 사이 어디쯤의 손길, 아니 발길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한 번, 두 번, 세 번, 내 왼쪽 볼 위의 작은 노크는 계속되었다. 눈이 떠졌다. 내 코 끝에 나의 고양이 호박이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우리 호박이구나” 나는 귀여운 그 노크에 화답했다. 

허리에 매달아 둔 돌덩이가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까맣고 촉촉해진 동공에 엄마 사람을 걱정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은 나를 깨우러 온 모양이다. 

처음이었다. 

이 날 이후였던가. 호박이는 내가 너무 오래 일어나지 않으면 분홍 젤리의 온도를 내 얼굴에 전해주며 나를 깨웠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나 보다. 


태어난 지 62일째 되던 날 나에게 온 호박이는 올해로 열다섯 살이다. 

내가 서른이 되던 해에 만난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나이 들고 있다. 



고양이들은 강아지와는 달리 산책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영역동물, 혼자 생활하는 동물 등의 본성으로 인한 이유도 있지만 귀가 예민하다 보니 차 소리, 오토 바이 소리에 잘 놀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놀람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사람 손을 벗어나 어디론가 숨어 버리기도 하기에 예측과 통제가 되지 않는 바깥 풍경 안에 고양이를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호박이는 좀 더 유별나다. 내가 설거지를 할 때 내 뒤에 앞 발을 가지런히 모아 앉아 나를 기다리곤 하는데, 그러다 가끔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다다다 뛰어 도망간다. 빚쟁이가 돈을 빌린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그렇게 빠르게 뛰지 못할 듯한 속도이다. 


전에는 초인종 소리에도 놀라 방으로 우다다다 뛰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호박아, 너 잡으러 온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좁은 공간에 머물면 통증이 더해지던 시기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 옆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더 심해졌다. 

옆자리가 비면 팔을 쭉 뻗었다 접기도 하고, 파스 향 폴폴 나는 크림을 꺼내 슬쩍 바를 수도 있는 기회가 생기지만 옆 자리에 누군가 앉는 순간 모든 게 불가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외출이 쉽지 않자 동네를 기웃거렸다. 

호박이와 함께였다. 

시작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케이크를 포장하러 가는 길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데 내 앞에 앉아 까만 동공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나도 같이 갈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호박이를 두 팔로 번쩍 안아 어깨에 걸쳤다. 집에서 자주 하는 자세라서 호박이도 안정감 있게 자릴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산책을 시작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이제 4년째다. 요즘에는 프릴이 달린 민트 색 옷을 입고 유모차도 타고 다닌다. 

(유모차 때문에 가끔 아기엄마로 오해받음)

사람들이 다가와 쓰다듬어주고 귀엽다, 예쁘다 해주면 감실감실한 눈과 골골골 송으로 더욱 사랑스러움을 뽐낸다. 


딸랑딸랑- 문을 열고 들어간 카페 사장님이 호박이를 보고 말했다. “우리 단골손님 왔네”

그날, 케이크를 포장하러 나가는 길에 “나도 같이 갈래”라는 호박이의 눈빛은 내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된 언어일지 모르겠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나도 같이 갈래”가 아닌 “너도 같이 가자”라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홀로 바깥 구경을 나서던 통증인에게 동행인이 필요한 마음을 담은 해석말이다. 

기특하게도 이제는 오토바이 소리 같은 바깥소음에도 놀라지 않는 호박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코 끝으로 느끼고, 엉덩이를 방실 대며 런웨이를 누비듯 어디서도 잘 걷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호박이는 내 컴퓨터 옆에 앉아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탄산수 뚜껑을 갑자기 떨어트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뚜껑을 주워 테이블에 뒀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잠시 후 호박이는 내 눈을 쳐다보며 오른발로 다시 한번 뚜껑을 떨어트렸다. 

“다시 주워” 호박이의 눈빛이 읽힌다. 

부쩍 살이 오른 나를 운동시키는 요물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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