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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글 Nov 26. 2024

'프로사직러'를 사직한다

지금의 나를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말하자면 나는 프로사직러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내로라하는 직장을 다녔으나, 20대에는 대기업을, 30대에는 공공기관을 내 발로 박차고 나왔다. 대학을 갓 졸업했던 20년 전에는 실수령액 4천만 원을 넘는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했고, 10년 전에는 출퇴근만 지킨다면 절대 잘리지 않는다는 공공기관 소속의 대학 행정직에 다녀봤지만 결국은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정규직 외에도 출연연 인턴, 출판회사, 사회조사분석센터 자리 등 계약기간이 짧은 곳까지 나열하자면 그야말로 사직서를 쓰는 것에는 프로였다.     


그렇다면, 프로사직러는 사직을 후회하지 않는가? 자신 있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후회한다. 후회를 하지 않는 선택이 애초에 가능한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는 후회를 반복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왜 이런 회사에 들어왔나 후회했고, 회사를 그만두면 그 아까운 회사를 왜 그만두었나 후회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또다시 입사하려고 애쓰고 입사 후에는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사직서를 제출하고야 마는 삶을 반복했던 것이다. 이제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게 된 나에게 공부했던 것이 아까우니 늦은 나이로도 가능한 공무원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주위의 권유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또다시 사직서를 제출하게 될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살아왔냐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시절 나는 지방국립대를 졸업하기는 했어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았던 수석졸업생이었다. 각종 자격증, 900점대 토익점수 등 쓸만한 스펙을 갖춘 노력형 인재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의 도전과 실패를 기다려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을 먼저 했다. 내가 처한 환경은 나를 어떻게든 안정적인 취직자리로 밀어 넣었다. 다만, 불행하게도,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너무’ 명확했다. 나는 내 취향을 드러내고 싶고, 무엇이든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런 나의 적성을 고려하기엔 삶이 너무 버거웠고, 현실을 고려하자니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나의 정체성 덕분에, 나의 삶은 이상과 현실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걸었다.      


 

당시에는 축복이라 여겼던 첫 직장, 그러니까 대기업 합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이라 여겨졌다. 일찍이 기계치였던 내가 전자제품 회사 마케팅팀에 입사한 것부터가 코미디였지만,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엄마가 돌아가시는 일을 겪고는 그 회사의 월급조차 더 이상 치료제가 되어주지 못했다. 모친상을 치르고 돌아온 바로 그 주에 나의 팀원들이 나를 회식자리에 끌고 가 분위기를 띄워보라며 다그친 것은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때 사직서에 자신 있게 썼던 말이 기억이 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 그만둡니다.”라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참 대책 없이 용기 있었네.     


엄마의 부재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현실문제 따위 ‘될 대로 되라지’라는 자유를 주기도 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는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원하는 걸 하자고. 어려서부터 소원했던 그림을 배우려고 평생 교육원에 등록했을 때는 내가 너무 열심히 그리니까 강사님이 본인 화실에 나와보라고 하셨다. 서울까지 먼 거리를 왕복해 가며 카피라이터 과정을 수료했을 때는 광고회사에 추천되기도 했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가고자 하던 때,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출판사 자리도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빠의 병세가 악화된 상황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병원비 고지서는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언제까지 취미놀음이나 하며 취직을 유예할 수는 없었다. 간병을 이어가야 했기에 지역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하려던 용감한(?) 발걸음은 현실문제 앞에 번번이 주춤거렸다. 얼마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새로운 분야를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것 보다야, 하던 대로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이 여러모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간병하는 틈틈이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취업 시장에서 내정자에게 밀린다면 내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백이 문제가 된다면 시험을 봐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어디든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필기시험 실력이 갖춰졌을 때, 집에서 가까운 곳, 가장 빨리 합격한 직장을 선택한 것이 공공기관 소속의 대학 행정직이었다.      


 

마지막 선택이라 생각한 직장은 첫날부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부서에 발령받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신입에게 부서실적을 써내라고 했다. 응? ojt랄 것도,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시작된 업무는 전임자가 벌려놓은 문제들, 혹은 시스템이 바뀌면서 벌어진 문제들, 타 부서에서 잘못 처리된 문제들이 한 대 뭉쳐 곳곳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직장은 너무나도 전근대적이었다. 부모님이 내로라하는 직업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힘없는 부서의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로 갖가지 불합리한 일을 겪었다. 남자직원들은 삼겹살을 굽지 않고 먹기만 한다. 응? 여자직원은 과장급이 돼도 커피를 타지만, 남자직원은 계약직이나 인턴사원조차 커피를 타지 않는다. 응? 밉보이면 야근을 해도 행정수당 근무표에 올라갈 수 없다. 응?


 아무리 사직서를 쓰는데 ‘프로’인 나였지만, 그만한 일로 사직서를 던지기엔 내 현실이 너무 버거웠고 더 이상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러니 3년만 버텨보자 했다. 집에서는 아픈 아빠가 밤낮으로 나를 필요로 했고, 회사에 나가면 잘못된 일들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그래도 참고 버티다 보니 내 입지도 안정이 되고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갔다. 그러니 버텨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즈음이었던가. 회사 출근길에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식은땀이 났다. 호흡곤란이 와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곧바로 아무 정거장에서 내려서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한참 호흡을 가다듬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다. 그때는 그러니까 그게 공황장애인줄도 몰랐다. 매일 야근을 하고, 간병을 하고, 대학원 공부를 마무리해야 했으니, 너무 바빠서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나를 버린 건지 아니면 도운 건지, 3년 차 되던 해에 맹장이 터진 줄도 모르고 의사가 오진을 하는 바람에 복막염으로 진행되어 죽을 뻔 한 뒤에 겨우 살아났다. 그 사건은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또 다른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두어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직장에는 내 업무에 문제가 있음을 명시한 감사결과가 올라와 있었다. 하나는 타 부서의 잘못으로 발생된 문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전임자 근무기간 중 발생한 문제였지만, 누가 알겠어. 결국 내가 현재 맡고 있는 일인걸. 그러니 수습은 내 몫이었다.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절대 감사에 걸리지 않았다. 그게 상위기관에 보고 되었을 때 문제가 되면 안 됐기 때문에 일찍이 덮어졌고, 별 일 아닌 일이 크게 부풀려져서 잘못된 일을 덮는 용도로 쓰였다. 일에 대한 성과는 힘 있는 자들이 나누어 갖고, 잘못된 일은 내 책임이 되다니. 이 회사는 여러모로 미래가 없구나. 3년을 버텼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불합리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사직서를 낸 거냐고? 그건 아니다. 그러니 그 직장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직서를 냈다는 말은 반만 맞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 너무도 명확했으니 전자회사 마케팅 팀(말이 좋아 마케팅팀이지 영업직이다)이나, 대학교 행정직원(정해진 예산 처리를 주로 하는)이라는 직업이 적성과 맞을 리가 있나. 아빠를 간병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자위했지만, 좀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남들 눈에 그럴듯한 직장을 갖고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불우했던 환경과, 힘들었던 나의 노력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성공한 삶으로 보일까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앞으로 뛰었다. 당장의 결과에 연연하며 사로잡혀 있었다. 애초에 그곳이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곳이라 해도 나는 방황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사직으로 이어졌다.


남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직장으로부터 도망칠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을지언정, 그 실패를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었다. 재미로 보는 타로점에서조차 연애운도, 남편운도 아닌 ‘직업운’을 가장 궁금해하던 내가, 간병이라는 ‘돌봄 노동’을 거쳐, 가족의 자아실현을 돕는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남편이 외벌이로 버거워할 때마다, 아이가 다니고 싶다고 하는 학원 등록이 망설여질 때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받을 수 있던 연봉과 복지를 포기한 것이 아쉬웠다. 열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진득하니 한 분야에서 버텨낸 덕분에 자리를 잡았다는 누군가의 소식을 들을 때면 조바심이 났다. 그저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을 열심히만 해왔다. 왜 방향성도 없이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가. 왜 그 열심으로 버텨내질 못했는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열정이라는 게 욕심이고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을 좇아도 꿈을 좇아도 늘 반대편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빈털터리로 꿈을 좇을 용기도 없으면서 왜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 때, 지난날에 대한 후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후회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야만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깝다고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갈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더 이상 사직의 이유가 전 직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면 안되는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나의 선택을 변명하며, 후회를 또 다른 후회로 덮어서는 안되었다. 당장 조바심이 난다고 해서, 또 비슷한 직장에 들어가서 후회하고 도망치는 짓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나는 열심히 살았으니 저 정도는 됐어야 한다는 남들과의 비교도 사절이다.      


후회로 남았던 과거는 그 이후의 삶에 따라 언제나 새로 쓰여질 수 있다. 나는 내 건강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나의 정체성을 억누르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비록 초보의 길 일지라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향해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매일 아주 조금씩 뭔가를 해내고 싶을 뿐이다. 오로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의 진짜 모습으로 실패하거나 성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후회’에 대해 쓰고 있다. 지금까지 써 왔던 것이 아니라, 새로 써 내려갈 것들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1차 세계대전 종류 직후, 누군가 제임스 조이스에게 세계 대전 때 당신은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전쟁에 나서지 않은 것을 힐난하는 민족주의자의 질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율리시스>를 썼습니다. 당신은 무얼 했나요?”

- 나는 도망칠 때 가장 용감한 얼굴이 된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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