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잠이 덜 깬 거 같다. 점심 식사 이후 사무실 책생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무겁다.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피가 잘 안 도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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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피터슨 교수의 강연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데
최근에 알고리즘의 신비로 또 한 번 인터뷰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행복을 추구하지 마라’는 다소 자극적인 타이틀의 영상이었는데, 매우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나 또한 평소에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된 수많은 허위와 기만을 목격했기에,
뚜렷한 관점이 없는 맹목적인 행복 추구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행복에 대한 정의 역시 단순한 감정의 영역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피터슨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삶의 목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행복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순간의 일부이며, 다가왔을 때는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목표가 되는 순간 허상을 쫓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사실 인생의 대부분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정 자신을 위한, 곧 인격적 성숙을 위한 모든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은 결코 타자와 공동체에 선익에 위반될 수 없음을
음악의 하모니에 빗대어 얘기하였다.
나를 위한 선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다.
내가 하는 행위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는다면 그건 꽤나 명료하다.
예를 들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과식하거나,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게임이나 영상, 섹스, 약물 등 다양한 중독거리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길 기꺼이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 한가?
그것이 자신에게 악영향을 줄 것임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칸트는 스스로의 행위의 준칙이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것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 자해에 관해 비윤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일상에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을 서슴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규칙,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스스로를 지탱해 주는 삶의 울타리가 될 때,
인간은 그 규칙 안에서 성장한다.
매일의 꾸준함이 습관을 만들고 인격을 형성한다.
그 인간적 성숙이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된다.
그런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선택, 그것이 시작이다.
추구해야 할 것은 거품 같이 사라져 버리는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인격의 성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