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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무엇을 묻는 날인가?

종교를 넘어, 인간의 깊이로

12월 25일,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리는 화려하고, 인사는 넘치지만

정작 이 날이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은 점점 희미해진다.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은 많아졌지만,

“예수처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예수는

성전의 강단 위에 있지 않다.

권력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다.

예수는 여전히

밥이 필요한 사람 곁에 있고,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당한 구조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성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 부처는 절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욕망의 속도를 늦추고, 고통의 원인을 묻는 침묵 속에 있다.

나. 공자는 제사의 형식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인(仁)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다. 마호메트는 증오의 깃발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약자를 보호하라는 윤리로 남아 있다.

라. 노자는 권력의 꼭대기가 아니라 낮은 곳을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속삭인다. 이들은 모두 묻는다.

“너는 종교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너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종교를 넘어서 종교의 깊이로

오강남 교수는 이를 ‘심층종교’라 불렀다.

교리·의례·조직을 넘어

종교가 태어난 근본의 자리,

곧 인간을 살리고 세상을 회복하는 힘 말이다.

심층종교의 핵심은 단순하다.

신을 말하기 전에 사람을 먼저 보라

믿음을 주장하기 전에 삶으로 증명하라

소속을 묻기 전에 고통을 응답하라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탈종교의 시대를 지나

탈종교 이후의 종교성을 마주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김수환 추기경은 이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 불렀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

믿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이다.

그는 말보다 태도로,

권위보다 연대로,

교회보다 양심으로 신앙을 증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정의사제구현단은

제단을 떠나 거리로 나섰다.

그들이 선택한 예배는

침묵이 아니라 발언이었고,

기도문이 아니라 연대였으며,

성당 안의 평화가 아니라

사회 속의 정의였다.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교회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제도도 아니다.

교회는

함께 밥을 먹는 공동체,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관계,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양심이다.

예수가 성전의 상을 엎은 이유는

종교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성탄절은 묻는다

성탄절은 축제가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우리는 종교를 말하면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우리는 신을 부르며 인간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예수는 다시 태어난다.

교회 안이 아니라

밥상 곁에서,

현장 속에서,

양심을 선택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성인은 존재한다.

부처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노자도

모두 같은 자리에서 묻는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있느냐?”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조금 더 인간다워진다면,

조금 더 낮아질 수 있다면,

그날이 바로 진짜 성탄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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