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과 이오덕, 그리고 다움 김종훈의 마음공부
진양호의 노을은 늘 늦게 도착한다.
빛이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면, 세상은 그제야 서두르던 걸음을 멈춘다.
오늘 오후, 아천 북카페 창가에 앉아 물 위로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책장을 넘겼다. 책장은 내가 넘기지만, 마음은 노을이 넘긴다. 문장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빛 때문에, 나는 자꾸만 같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빨리 이해하려는 습관이 노을 앞에서 무너졌다. 오래 바라보는 법을, 오래 생각하는 법을, 오래 아파하는 법을—빛이 다시 가르쳤다.
그 순간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이었다.
나는 청년 시절 『강아지똥』을 읽으며 울었고, 『몽실 언니』를 읽으며 세상이 잔인하다고 느꼈다. 아이였던 나는 이야기의 슬픔을 먼저 만났다. 그런데 쉰을 넘어 다시 읽을 때, 슬픔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이야기의 비극이 아니라, 삶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권정생의 문장은 가난과 병과 전쟁의 그늘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그 그늘 속에서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아주 작은 불씨 하나를 끝까지 지킨다.
그는 거창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줌의 존엄”을 말한다.
강아지똥이 흙으로 돌아가 민들레가 되는 이야기에서, 나는 늦게야 깨닫는다. 낮은 존재가 낮은 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늘 위를 향해 올라가라고 말하지만, 권정생은 아래를 향해 내려가라고 말한다. 내려가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인간의 이름을 다시 써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내려감의 언어를, 이오덕은 평생 붙잡았다.
그가 말한 ‘아이의 말’은 단지 교육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스스로에게 묻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우리는 누구의 말로 세상을 꾸미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정답’을 만들고 있는가?
이오덕 선생님이 강조한 ‘삶의 언어’는 화려한 문장이 아니다.
그는 “바르게 쓰라”보다 “살아 있는 말을 하라”라고 했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말이 사라지는 순간, 공동체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먼저 보았다. 아이들의 말은 미숙해서가 아니라, 너무 정직해서 종종 어른들의 체면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의 말을 “지도”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꺾고, “평가”라는 이름으로 지운다. 그때부터 언어는 삶을 설명하지 못하고, 삶은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다.
권정생과 이오덕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나는 오늘 노을 앞에서 그 두 길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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