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야전에 배치된 나는, 이제 영관장교로서 위관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본격적인 경쟁의 무대에 올라야 했다.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였다. 나는 세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첫 번째는, 현재 내가 군단 직할 연대의 작전과장으로 보직되어 있으니 군단 사령부 참모부의 작전 실무자로 진출하는 길이었다. 이는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군단 실무자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통해 자연스레 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단점도 있었다. 육군대학 입과 전, 나는 소령(진)으로서 군단 소령 실무자 경험이 있었다. 그 자리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소령인데 대위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된 실무생활이 이어졌고, 보직 순환 역시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았다.특히 진급에 필요한 핵심 보직에 들어가기 위해, 1~2년간 ‘서비스 보직’을 감수하더라도, 이후 실제로 희망 보직에 안착하지 못하는 사례를 나는 수없이 목격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선택이었다.
두 번째는 사단급 보좌관으로의 진출이다. 나는 대위 시절 사단 작전장교를 지냈기 때문에, 사단급 보좌관, 특히 작전계획장교(작전보좌관) 로서의 역할에 익숙했다. 더구나 나는 작전 직능을 보유하고 있어, 해당 직책에 보직되기만 하면 중령 진급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은 높았다. 군단 직할대에서 인접 사단의 작전 보좌관으로 가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사단 예하의 4개 여단, 16명의 소령과장들이 사단 참모부 보좌관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고, 사단 직할부대의 소령급 지휘관들 역시 거의 예외 없이 이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다. 외부의 타 부대에서 전입자가 핵심 직책에 보직되는건 ‘하늘의 별 따기’에 비유해도 과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작전사령부급 이상의 상급부대로 진출하는 방안이었다. 소령 직책이 상대적으로 적어 경쟁률은 낮았지만, 문제는 그 소수의 핵심 직책에 대부분 육사 출신들이 보직된다는 점이었다. 비육사 출신에게는 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길은 개인의 희망만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육사 출신들은 강력한 학연과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준다. 그러나 학군장교 출신인 나는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이 방법은 과감히 포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었다. 진급도 중요하지만, 나는 영관장교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는 ‘사단급 보좌관’이라는 직책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결국 두 번째 길을 내 군 생활의 방향으로 설정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사단급 소령 보좌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를 가지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군단 예하 사단으로 직위조정을 신청해서 여단 과장이나 직할대장을 거쳐 기회를 엿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외부 전입자로서 좋은 보직을 받을 가능성은 낮았다. 통상은 보조적인 자리부터 시작하며, 핵심 보직으로 옮겨지는 데 2~3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이 방식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는, 곧바로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나는 그런 보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이나 후원자가 없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급자 곁으로 먼저 다가가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떠오른 방법이 바로 ‘군단장 비서실장’ 보직이었다. 이 자리는 소령 계급에서 가장 가까이 군단장을 보좌하며, 보직 종료 후에는 군단장의 후광을 입고 핵심 직책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자리 또한 육사 출신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과감하게 목표를 세웠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것이 없지만, 조건을 하나씩 갖춰나가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믿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내가 맡은 연대 작전과장 임무를 수행했다. 계획서 하나, 보고서 하나에도 정성을 담았다. 그리고 연대장님이 군단장님께 보고하는 자리에서, 내 이름이 처음 거론되었다.
“이 보고서는 저희 작전과장이 작성한 것입니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 군단장님과 참모장님께 나라는 존재를 긍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단순히 ‘임무수행 잘하는 장교’가 아닌, ‘군단장 최측근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장교’로 보이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내 의지를 대신 전하고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우리 연대장님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군단 참모장은 주기적으로 직할대 지휘관들을 소집하는데, 우리 연대장님은 그들 중 최선임자였다.
당시 나는 연대장님께 내 뜻을 직접 밝히지 않았다. 너무 일찍 속내를 드러내면 그간의 노력조차 자신을 이용하려는 의도로 비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묵묵히, 때로는 너무 마음이 아파 울면서, 연대장님의 무리한 지시에도 “알겠습니다”로 일관하며 모든 업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우리 연대는 군사령부에서 평가하는 연대전술훈련평가(RCT)에서 최우수 부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연대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작전과장, 다음 보직은 어떻게 하고 싶나?”
기회는 찾아왔다.
“군단 비서실장을 하고 싶습니다.”
“그건 왜? 군단 작전처 실무자가 진급에는 더 좋지 않나?”
나는 진지하게 내 계획을 설명드렸다. 연대장님은 말없이 내 말을 들으시더니 말씀하셨다.
“알겠다. 자력표 하나 출력해와라.”
잠시 후 연대장님은 군단 참모장님께 전화를 걸고, 바로 내 자력표를 가지고 군단 사령부로 향하셨다. 두 시간 뒤, 연대장님이 돌아오셨다.
“내가 참모장님께 잘 말씀드렸다. 너를 군단 비서실장으로 보직시켜 달라고. 다른 지원자가 여럿 있었지만, 군단 직할대의 고생 많은 작전과장을 쓰는 게 더 낫다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참모장님도 ‘00연대장이 그렇게 강하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며 웃으시더라. 걱정 마라. 잘 될거야.”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났다. 모든 서러움과 외로움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날 저녁, 연대장님과 둘이서 호프집에서 소맥을 나눴다. 평생 잊지 못할 기쁜 날이었다.
결국 두달 후 나는 군단 비서실장에 보직되었다. 학군장교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1년간 최선을 다해 군단장님을 모셨고, 보직 종료 시점에 군단장님은 나를 예하 사단의 작전보좌관으로 보내 주셨다.
P.S. 참고로, 군단장님과 연대장님은 육사 출신, 군단 참모장님은 3사 출신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