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맥덕의 맥주 양조 수첩 : Batch 1 - 대멸종
처음 홈브루잉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2017년쯔음, 학생이었던 나는 주기적으로 다른 맥주 마니아들과 함께 맥주들을 나눠 마시는 쉐어링 자리에 참가했었다. 수많은 전설적인 맥주들을 맛 볼 수 있었던 감사한 자리였으나, 동시에 모임에 들고 갈 맥주를 구하기가 점점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맥주를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하였고, 그 끝에 내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홈브루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맛있다는 맥주들을 어느 정도 맛 본 만큼, 무엇이 좋은 맥주인지 얘기 할 수 있었기에 이것들을 직접 만들수만 있다면 획기적으로 돈을 아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였다(물론 이는 더닝 크루거 곡선에서 우매의 봉우리 바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처음 맥주를 만들기 위해 온라인에서 여러가지 정보를 뒤지며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았고, 홈브루잉을 가르쳐준다는 분을 만나 한 번 같이 맥주를 만들어 본 뒤,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내 첫 번째 맥주를 디자인하였다.
내가 처음 만들기로 결심한 맥주의 스타일은 뉴 잉글랜드 페일 에일이었다. 당시 내가 푹 빠져있던 'Trillium Fort Point' 스타일의 가볍고 마시기 편하면서도 홉의 싱그러움을 가득 담은 페일 에일로 트릴리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재료를 참고한 뒤 수많은 인터넷 글들을 찾아가며 레서피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홈브루잉에서 뉴 잉글랜드 IPA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탓에 홉의 향기는 날아가고, 산화된 맥주 맛을 반복해서 맛봐야 했다. 결국 조금 더 쉽게 만들 수 있었던 스타우트나 사워 등의 스타일을 만들며 뉴 잉글랜드 IPA 양조는거의 접게 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2021년, 운명처럼 을를 대표님을 만나 양조사로 채용된 후, 레서피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스타일부터 만들어 가며 자신감이 붙은 나는 다시 뉴 잉글랜드 IPA에 도전했다. 대표님의 전폭적인 지원과 나의 발전한 기술 덕분에 높은 수준의 맥주를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을를 오픈 직전까지 매주 한두 배치를 양조하며 끊임없이 디테일을 다듬었다.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 성취에 가까웠고, 을를의 주력 맥주가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을를에서는 좀 더 가볍고 마시기 쉬운 맥주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를을 오픈하고 난 뒤 한 달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브루펍 형태의 양조장이라면 조금 경쟁력이 떨어지는 스타일이라도 소비자들은 소비해준다는 것이었고 (비록 우리 바이젠이 파울라너 바이스비어보다 맛은 없겠지만, 방문해주는 소비자들은 우리 바이젠을 사랑해준다!), 두 번째는 뉴 잉글랜드 IPA는 놀라울 정도로 잘 팔린다는 것이었다.
마니아층 소비자들은 을를에서 조금 더 특별하고 힘 있는 맥주가 출시되기를 기대했고, 초보자들은 IPA의 향긋한 과일향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강한 쓴맛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 잉글랜드 IPA는 맥주 입문자들부터 마니아까지 전부 사로잡을 수 있는 맥주 스타일이었고, 시장 논리에 따라, 그리고 내 욕구에 따라 자연스레 우리는 뉴 잉글랜드 IPA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진형님과 나는 어떤 맥주를 만들어야할지 의논했고, 나는 자연스레 내가 처음 홈브루잉에 뛰어들었을 때 만들었던 맥주를 떠올리며 뉴 잉글랜드 페일 에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떠냐 얘기를 꺼내보았다. 드링커블한 맥주를 선호하는 진형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나는 6년 전에 만들었던 레서피를 기억에서 되살려가며 다시 레서피를 써내려갔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라면 이번에는 내가 그 당시 그토록 사랑했던 포트 포인트 페일 에일이 아닌, 토플링 골리앗의 수도 수에서 영감을 얻어 레서피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사실 포트 포인트나 수도수나 둘 다 시트라 뉴 잉글랜드 페일 에일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포트 포인트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에 비해 수도수는 2023년 쯤 부터 국내에서 플래그십급(?) 뉴 잉글랜드 IPA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가는 것이 느껴졌었고, 퀄리티 역시 오늘날의 트렌드에서는 조금 벗어나게 된 포트 포인트에 비해 수도수는 조금씩 레서피를 바꿔오며 계속 최신 트렌드에 적응해나가기 때문에 훨씬 더 소비자분들에게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레퍼런스 대상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표한 것은 단순했다. 수도수보다 맛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수도수보다 싸게 만드는 것. 수도수, 그리고 비단 수도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항공 운송되는 수입산 뉴 잉글랜드 IPA들의 공통점으로 그들은 압도적인 퀄리티로 국내 시장을 교란시킬 수 있지만 다행히 가격이라는 가장 중요한 억제기가 남아있기에 우리같은 국내 크래프트 양조장들도 접근성, 가격, 그리고 로컬성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고 이에 우리의 뉴 잉글랜드 페일 에일은 수도수의 이런 약점을 겨냥해 만든 맥주로 시작되었다.
컨셉이 정해지자 레서피를 구성하는 것은 쉬웠다. 베이스 몰트에 귀리, 그리고 아주 약간의 크리스탈 몰트. 풍성한 월풀 홉에, 더욱 더 풍성한 드라이 호핑, 그리고 뉴 잉글랜드 IPA 효모. 가장 어려운 것은 매번 그렇지만 맥주의 이름을 정해주고 라벨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수도수에서 영감을 받아 티라노사우르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하였고, 이를 픽셀 아트로 디자인 해 키치하면서도 귀여운 맛이 있게 디자인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공룡 하면 나에게 바로 떠오르는 키워드였던 '멸종'을 아예 맥주 이름으로 선택하여, 대멸종이라는 맥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가끔 만화가들의 인터뷰를 보다보면 캐릭터가 만화를 이끌어간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작가 본인의 치밀한 계획과 상상에서 등장 캐릭터들이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생명이라도 가진듯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이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극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대멸종이라는 맥주 역시 비슷하다. 큰 기대 없이 내놓은 이 맥주는 출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고, 귀여운 라벨 디자인과 '대멸종' 이라는 조금은 두서 없는 이름 덕분에 맥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혹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후 대멸종이 함께한 맥주 축제에서는 뉴 잉글랜드 페일 에일이라는, 드링커블하지만 여전히 마니악한 레벨에 있는 스타일의 맥주가 라거와 비슷한 매상을 올렸으며 외부 미팅이 있을 때는 대멸종을 포함한 여러 병을 샘플로 드리면 언제나 대멸종을 원한다고 회신이 올 정도였다. 우리는 파일 오브 데이즈라는 을를의 서브 브랜드의 방향성 자체를 대멸종과 비슷한 맥주를 만드는 브랜드로 만들어갔고, 대멸종의 베리에이션 맥주들을 출시하였고, 앞으로도 출시 예정이다. 조금은 딱딱했던 을를이라는 브랜드에 말랑말랑하고 귀엽고 키치한 감성을 더해주었고 이 덕분에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재미있는 맥주와 굿즈들을 기획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 맥주 하나로 우리의 브랜드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멸종을 성공(?)시킨 이후로 우리 양조팀에게는 브랜딩 철학과도 같은 무언가가 생겼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방식인데, 바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보여주자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함께 맥주를 만들어가는 진형님도 그렇고, 을를의 양조팀은 '척'에 서툴다. 관심 없는 것에 관심 있어 하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별로 안 친한데 친한 척, 이런 '척' 보다는 부족하더라도 진심으로 부딛치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맥주를 만들더라도 뭐가 유행한다고, 이런 이름이 트렌디하다고 무턱대고 따라가기보다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우리 을를의 맥주들이 만들어내는 여정을 함께 따라와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멸종은 오늘날 을를에서 가장 많이 만든 레서피가 되었다. 당장 이 글을 쓰는 지금 기준으로 3일 전에도 가장 최신 배치를 양조했다. 만들 때 마다 세세한 디테일을 조정하며 만들고 있고, 한 번은 코어 라인업임에도 코스트가 너무 높아(비슷한 스타일인 헬로, 월드! 의 1.7배) 홉을 아주 살짝 줄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맥주의 맛을 보고는 고작 5만원, 한 병에 50원만 덜 받으면 쓸 수 있는 돈 때문에 홉을 1kg씩 줄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번 배치는 역대 일반 대멸종 중에서는 홉의 양이 미세하게나마 가장 많을 것인데 과연 어떻게 나올지가 기대된다(물론 홉의 양과 맥주의 퀄리티가 정비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최선의 배치가 나와주지는 않지만, 처음 뉴 잉글랜드 IPA로 양조에 빠진만큼 가장 많이 만들었음에도 만들 때 마다 두근거리고 이번 배치는 어떻게 나올지 가장 기대되는 맥주이기도 하다. 조금 더 내가 우러러보던 그 맥주에 가까워 질 수 있도록,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하여 수도수를 '멸종' 시켜버릴 수 있는 그런 맥주를 만들어내는 날을 기약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