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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May 22. 2024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유년시절의 추억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외여행을 갈 형편이 안되니 '세계테마기행'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유럽의 솟아오른 설산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 중국대륙의 웅장한 산세와 화면으로 보아도 짜릿한 잔도길, 베트남 하롱베이의 몽환적인 풍경, 우리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동남아의 시장 풍경 등 세계 각국의 자연환경과 사람 사는 모습을 방 안에 앉아서 볼 수 있으니 간접체험도 되고 좋다. 그러다가 저개발 국가의 어린아이들이 목각인형이나 목걸이 같은 소품을 만들어 여행자에게 파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유년시절 시골에서 살던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가 살던 시골마을은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짜기 작은 마을이었다. 골짜기를 따라 굽이 굽이 흐르는 시내가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이 100년쯤은 되었을 법한 큰 느티나무가 둘러 쌓인 성황당이 있었다. 산골짜기라서 논농사하는 집은 몇 안되고 주로 산비탈 가파른 밭에서 옥수수, 콩, 깨, 메밀 등을 경작하여 강냉이밥(옥수수)을 먹고사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마을 옆 산중턱으로 '신작로'라고 부르는 경강국도가 지나고 있었는데,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처럼 쭉쭉 뻗은 미루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비포장 도로였다.  당시 영동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강릉 가는 차량은 모두 이 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관광버스, 화물차, 승용차 등 각종 차량의 통행량이 아주 많았다. 도로변을 걷다 보면 오색 테이프로 장식한 신혼여행 택시도 많이 지나갔었는데, 하나 같이 택시 뒷자리에는 신부가 신랑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이 의아했었다. 철없는 마음에 시집을 가기 싫은 신부가 슬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다음에서 퍼 왔습니다.]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이 어울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나뭇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전쟁놀이도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놀았다. 봄이 오고 온 산에 진달래가 붉게 물들면 동네 아이들 몇 명이 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을 한아름씩 꺾어 들고, 경강국도가 지나는 '목네미' 고개에 올라가서 꽃을 팔았다. 차가 뿌연 흙먼지를 내며 달리는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꽃을 흔들며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외치면, 주로 승용차량을 타는 사람들이 5원씩을 주고 사갔다. 어떤 차는 이미 지나온 마을에서 사서 승용차 뒷좌석에 꽃이 있는데도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꽃을 판다고 생각했지만, 흙먼지 날리는 도로에서 흔들던 꽃을 왜 사갔겠나? 당시에 승용차 타는 사람들은 꽤나 부자들이었으니, 가난한 시골동네 아이들이 불쌍해서 용돈을 주고 간 것이겠지.



모두가 5원씩 받으면 5리(2km)나 떨어져 있는 가게까지 걸어가서, 계급장 모형과 과자 등 여러 가지를 샀다. 집에 올 때는 계급장을 옷에 달고 "내가 높다. 네가 높다" 서로 우기며 장난도 치고 과자를 먹으면서 집으로 왔다.




집에서 학교가 멀기 때문에 등ㆍ하교할 때는 동네 형들과 같이 다녔다. 도로에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돌 팔매질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허공으로 떨어져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5학년인 동네형과 집으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동네형이 지나가는 관광버스에 돌을 던지고 쏜살같이 달아나서 보이지도 않았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서 뛰다가 쫓아온 운전기사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운전기사에게 끌려가면서 관광버스를 보니 승객 한 명이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어 겁이 났다. 교무실에 끌려가니 담임선생님이 돌을 던진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서 동네 형 누구라고 실토를 했다. 집에 와서는 아버지가 혼내지는 않을까 괜히 걱정을 했는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그 형 아버지가 보상을 해 줬다는 얘기를 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초에 전학을 해서 그때 아이들이 왜 돌을 던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어쩌면 어린 나이에도 자기들은 가난하게 사는데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는 사람들한테 시기심이 생겨서 그랬던 것 같다.




더운 날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다가 개울을 지날 때는 옷을 홀랑 벗고 전라로 멱(수영)을 감았다. 물놀이할 때 헤엄을 못 치는 어린애들은 손으로 땅을 짚고 개구리헤엄을 치며 놀았는데, 동네 형이 조금 깊은 곳을 가리키며 "ㅇㅇ야 너 저기서 헤엄칠 수 있어. 못하지?" 하여 놀림당할까 봐 들어갔다가 이내 물속에서 허우적거려 그 형이 들어와 꺼내줬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유년시절 비록 가난해서 먹기 싫은 강냉이 밥을 먹기는 했어도 들과 산으로 마음껏 뛰어다니며 자연을 벗 삼아 놀았으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진달래 꽃을 사줬던 아저씨들, 난데없이 돌팔매에 맞아 다치신 분, 수영하다 위험을 유발했지만 구조해 줬던 동네 형 모두 너무 어릴 때이고 세월이 많이 흐르니 누구였는지 기억이 없다. 모든 분들 시골 아이들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신 은덕으로 행복하게 사셨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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