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상거래를 하라고?"
경희는 그 말만 들어도 아득해진다. 상거래라고는 자신이 소비자가 돼서 주문만 해봤지 한번도 팔아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 뭐 먹고 사냐. 돈이 있어야 하잖아"라는 기원의 충고에 경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이번에 태섭은 서너번 전화벨이 울리자 다 죽어가는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바로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결혼하리라 예상했던 상대에게 이제는 채권자 행세를 해야 한다는게 경희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그가 곧 돌려준다고 하고 가져간 돈 때문에 당장 자신의 생계가 막막해져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지냈어?"라며 경희는 애써 침착을 가장한다
"그렇지 뭐."
"입원은 했었구?"라는 말에 태섭은 "어.."하며 한숨과 짜증이 뒤범벅된 소리를 낸다.
태섭은 무엇이든 경희 탓을 하였다. 자신의 소설이 팔리지 않는것도, 월세가 밀리는 것도, 심지어 타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전처와 낳은 자식이 학자금 상환이 연체된 그 모든것까지.
그 말뒤에는 이 모든걸 경희한테 해결하라는 압력이 담겨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 관계를 '결혼'으로 끌어가려 부단히 노력하고 참았던 그녀지만 그에게 넘어간 돈이 5000을 넘기면서부터는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날, 동창인 기원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자 기원은 "너 바보냐?"라며 곧바로 타박을 하였다.
누구에게 물어도 경희와 태섭이 결합할 , 결혼할 확률은 없는듯했다.
태섭의 요구를 들어주다 자신의 카드빚에 자신이 압사당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경희는 용기를 내서 태섭에게 물었다. 언제 합치냐고.
그말에 태섭은 "뭘 합쳐. 평생 이렇게 가는거지"라며 에둘러 결혼할 뜻이 없음을 밝혔고 경희는 동창 기원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나 바보짓을 한다는 생각에 태섭과 관계를 끊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고 있는데 태섭이 남도 모 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돈 2000을 타게 된 걸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여태 태섭을 서포트 해온 자신에게 알렸어야 하는걸 그녀는 포털 기사를 보고 알게 됐고 그 일은 결정적으로 둘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태섭에게 일단 1000이라도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발끈하며 그는 온갖 육두문자를 다 쏟아냈다. 주면 되잖아. 에이씨...하고 그는 더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에게 털린돈의 대부분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넘게 다닌 의류회사의 퇴직금이었다. 그녀는 사업에 투자하려고 쓴것도 , 그렇다고 명분있는 기부를 하려 쓴것도 아닌, 고작 남자 하나에 '미쳐서' 털린 그 돈이 너무나 아깝고 아쉬웠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여자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이따금 돈에 대한 갈급함에 헤어진 태섭에게 연락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전화를 안받거나 메일이나 메시지를 며칠씩 열지 않는 방법으로 그녀를 따돌렸다. 그러다 어느날밤 그녀는 오랜만에 그의 '작가연'하는 긴문장의 메일을 받았다.
"내가 몸이 안좋다. 특히나 공황장애가 심해져 며칠 집중치료를 받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니 공을 모르는바 아니니 기다려라"라고 쓰여있었다.
무작정의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는 그녀는 용기를 내서 며칠후에 다시 전화를 한것이고 그는 마지못해 받아서는, 그녀가 돈좀,이라고 하자, 나중에 얘기하자,라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와 단절될 즈음, 그녀를 더욱 자극한 것은 그의 여자들이었다. 그는 경희가 옆에 있어도 그녀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기에 바빴고 경희가 대체 누구들이냐고 하면 제대로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알지도 못하는 그런 사이들 같았다. 서로가 누군지도, 결혼 유무조차 모르면서 그는 마구잡이식 사귐을 해온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이 대체 어떤 존재들인지는 몰라도,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는 경희를 놔두고 한눈을 팔게 할 정도면 최소한 경희보다는 젋은 육체에 경제력이 탄탄했으리라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진 뒤 돈 이야기만 나오면 쌍욕을 해대는 그를 '법'으로 처리하나, 생각도 해보았고 여기저기 물어도 봤지만 그게 또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생활부터 굴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어느정도 돈이 모이면 그때 태섭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하였다 .변호사 비용이라도 모으고 난 뒤에...라고 그녀는 일단 태섭을 자신의 삶에서 배제시키려고 하였지만 그것또한 쉽지가 않았다. 어쩌면 정말 갈급한것은 돈이 아니라 그가 돌아오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게 하였다.
그녀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른 아침이나 한밤, 동대문 의류 시장에 가서 사입을 해 온걸 일일이 촬영을 하고 그걸 온라인에 띄우고 주문들어온걸 일일이 포장, 택배로 부치는 일련의 과정들, 그리고 사업의 '사'자도 경험한 적이 없는지라 그렇게 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머릿속 상거래는 이처럼 의류니, 생활용품이니, 가구, 뭐 그런것들뿐이었다. 그러다 책...에 생각이 이른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내본적은 없어도 어릴적부터 책이라면 거부감 없이 닥치는대로 읽어온 그녀기에 책을 판다는 행위만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그러다 태섭도 만나지 않았던가.
"1인출판은 어떨까?"라고 기원에게 묻자 기원이 뜻밖이라는듯 "출판?"하고는 고개를 갸윳한다.
그때부터 둘은 컴퓨터를 켜고 1인출판 관련글을 찾아서 저장하고 같이 읽고 관련서를 다운로드하거나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경희 안에서 태섭의 존재감이 조금씩 사그라드는게 느껴졌다. 이러다 잘 하면 잊기도 하겠다, 싶을때, 기원이 "내일 구청에 가자"라고 하였다.
구청에 가서 출판사 허가서를 신청하자는 얘기였다. 관련 글을 읽고 저장을 하고 서적을 주문하고 하면서도 설만 내가 정말 하랴 싶던 그녀는 하루만 더...라고 계속 미룬다.
그러자 기원이 톡 쏘는 말을 한다. "너 그 자식한테 아직도 미련 남은거냐? 그자식이 돈이라도 돌려줄까봐?"라는 그말에 그녀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어, "그래 내일 가. 구청앞에서 오후 1시에 만나"라고 약속을 정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녀는 기원과 약속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 구비서류를 다시한번 점검하고 화장을 공들여 하고 그리고는 옷장에서 제일 정장 느낌이 나는 패딩을 골라입는다. 그리고는 패딩 지퍼를 올리다, 퍼뜩,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거지,하는 생각에 빠진다. 한번도 해본적 없는 장사라니...그녀가 퇴사를 한것도, 다 태섭과의 결혼을 염두에 둔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시간 너무 달렸다는 느낌에 잠시 쉬고 싶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태섭과의 신혼을 일하느라 돈버느라 빠듯하게 ,건조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고 아이 하나쯤 낳고는 복직을 타진하거나 타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생각이엇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이다.
그녀는 입던 패딩을 다시 벗고 침대에 맥없이 걸터앉는다. 그러자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그러고는 기원에게 약속취소 문자를 찍고 있는데 컬러링이 들려온다..태섭의 전화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리고는 다시한번 확인한다. 자신에게 지금 가장 급한건 그의 귀한인것을.
태섭은 급해서 전화했다며 돈 500만 빨리 부치라고 명령하듯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
당신 돈, 2000이나 받아놓고 하자, 에이 씨발, 하더니 그가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러는데 띵동 하고 메시지 알람이 온다. 기원이었다. 구청이라며 빨리 나오라고...그녀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은 짐승처럼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그러다 침실 창문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생존...이 저런건가,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같은건가,라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그제야 그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살아줄수는 없으며 빵 한조각도 자신의 힘으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녀는 벗어놓은 패딩에 팔을 꿰며 황급히 현관을 박차고나간다.
그녀를 태운 택시는 기원과 약속이 돼있는 구청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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