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은 이젠 아예 그녀의 다음 시나리오가 기다려질 지경이다. 근래 와서 거의 1주일 텀으로 보내오는 그녀의 시나리오에 처음에는 '낯도 두껍다'라는 생각을 안한게 아니다. 보통 한번 거절당하면 그 영화사는 피하기 마련인데 그녀 김희연은 줄창, 죽어라 공략을 해대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놉정도만 읽고 파기한 그녀의 원고를 이제는 그래도 본문의 반정도까지는 읽게 되었다. 이러다 이 여자 원고로 진짜 영화를 만들게 되는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다 어느날 부턴가 그녀의 원고 투고가 멈추었다. 처음에는'지쳤겠지'하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해서 혹시 몰라 저장해둔 그녀의 폰 번호를 찾아본다. 한번 보자,고 할까,하다가 영화를 만들것도 아니면서 무슨, 하고는 포기한게 여러번이다.
그녀는 작가양력에 딱 이름과 전화번호만 쓰고 그 어떤것도 적어보내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 작가 기성이 웹툰을 각색했다며 들고와서 그는 그의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한다.
최소한 손익분기점은 넘기리라 생각하고 그는 배급사 사장 k를만나 원고를 넘겨주고 가부를 알려달라고 한다.그렇게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 올겨울 마지막 눈이려니 한다.
그리고는 회사에 들어서서 컴을 켜자 오랜만에 김희연의 원고가 와있다.
"이 아줌마 안죽고 살아있었네"하면서 그녀는 그녀특유의 간단한 시놉과 기획의도, 그리고 원고를 읽어내려간다...그러다 문득 한번 만나보기나 하자,라는 생각이 들어 숨을 고른뒤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자 한참만에 그녀가, 그녀일 것으로 추정되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그녀는 목감기라도 앓는지 소리가 잠겨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영화사 파란풍선 입니다"라고 하자 상대방은 "아..."하더니 한동안 아무말도 없다.
"한번좀 뵐까요?"라고 하자 상대는 대뜸 "제걸로 가시나요?"라고 묻는다.
그말에 딱히 그럴것은 아니어서 정민이 대답을 못하자 "아니면 굳이 뵐 필요가..."하더니 상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라며 기분이 상한 정민이 폰을 책상에 내려놓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든다. 왜 이럴까?하다가 그는 그동안 그녀가 보내온 원고들의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죄다 '한 여자의 고통스런 사랑과 이별'이 주제였다. 어찌보면 너무나 통속적인 이야기들이어서 매번 제쳐둔것도 있는데 다시 정독을 해보자,라는 마음이 든다.
그렇게 아직 파기 되지 않은 김희연의 원고들을 출력해 정민은 읽기 시작한다.
'이 여자 ,어지간히도 연애운이 없구나'하다가 그의 뇌리를 퍼뜩 스치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이..그여자 김...하다가 그는 읽고 있던 원고를 떨어뜨리고 만다.
'맞아, 희정이었어... 김희정"
그 이름의 끝자만 바꿔 줄창 투고를 해온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언젠가 조감독시절 장소헌팅 차 갔던 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그녀는 까페를 작게 하고 있었다. 일을 일찍 마친 동료들이 먼저 서울로 떠난뒤 정민은 그 까페에 들어섰다. 거기서 가까운 곳에 그녀 '해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사라졌던 그녀가 그곳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다. 그래서 해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 까페에서 만나기로 하였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질 않았고 그가 계속 전화를 걸어대자 그녀는 아예 차단을 해버렸다.
초저녁에 들어와 폐점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누군가를 줄창 기다리는 그가 안됐는지 희정은 간단한 안줏거리에 맥주를 내왔다. 그제야 정민은 "죄송합니다. 가게문 닫으셔야 할텐데..."라고 일어나다 휘청하더니 그대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뜬곳은 까페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자신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는 희정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날밤, 정민은 그녀를 안았다.그리도는 다음날 아침,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그뒤 그는 당시 신인이던 기성이 써준 원고로 '감독입봉'을 하게 되었고 이따금 떠오르는 희정과의 일은 어쩌다 생긴 '해프닝'정도로 흘려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모델 은영을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하면서 둘 사이는 연애로 이어져 혼전임신, 결혼에 이르렀다가 6개월만에 '성격차'로 헤어졌고 그 과정에서 아이는 유산이 되었다.. 그러는동안 희정은 아예 없던 사람이 되었고 '돌아가마'약속했던 그날의 약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김희정이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이렇게 시나리오를 써온것이다.
정민은 당장이라도 희정을 만나 지난날을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자동응답만 흘러나온다. 그러자 빈손으로 만나는것 보다는 희정의 원고를 영화로 만들어서 가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그녀의 원고중 하나를 골라 영화작업에 들어간다.
희정의 원고로 만든 영화가 s 해외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젊은 영화' 로 뽑히면서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어서 귀국해 희정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귀국한 다음날 희연으로부터, 아니, 희정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온다. 그러나 본문 내용없이 파일만 첨부된 이메일이었다. 정민은 왠지 불길한 예감에 한참 뜸을 들이다 파일을 클릭한다. 그러자 이제 너댓살 돼보이는 사내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자신의 어린날을 꼭 빼닮은...
정민은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채 다음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남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희정의 친구 미영은 예전 희정이 운영하던 까페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희정인 내내 기다렸어요 그쪽이 돌아오길...그러다 완이를 낳았고."
희정은 죽기 전날 미영에게 자신이 써둔 시나리오를 김희연이라는 이름으로 정민의 영화사로 보내달라는 유서를 문자로 보냈다. 그걸 받고 미영이 희정의 집으로 달려왔을때는 희정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버린 뒤였다며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려댄다.
완이를 뒷자리에 태우고 올라오는 정민은 저만치 휴게소가 보이자 "너 우동 좋아해?"라고 묻는다. 그러자 아이는 그게 뭐지?라는 얼굴을 한다.
"아저씨가...사줄게. 맛있어. 한번 먹으면 또 먹고 싶을거야"라며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간다.
겨울을 마감하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걸 보면서 그는 '이제 겨울도 다 갔구나'하는데 완이가 자기가 먹던 가락국수를 정민의 그릇에 덜어준다.
"왜 맛없어?"
그말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아저씨 배고픈거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말에 정민은 울컥해서 아이를 꼭 껴안고 숨죽여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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