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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Feb 12. 2024

꿈이었어라

상희는 아이가 좋아할만한 케익을 찾느라 진열대를 한참 서성인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서 '아기들 이거 좋아하는데'라며 티라미슈 케익을 손으로 살짝 가리킨다. '정말 잘 먹을요?'



오늘 상희는 경환의 열살난 아들 완을 소개받기로 하였다. 어린아이와의 만남인데도 마치 경환의 부모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녀는 며칠 내내 긴장하고 소화도 제대로 안되었다.

"이 엄마 노릇할 수 있어?"라며 에둘러 청혼한 경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결혼한다면 정말 완에게 올인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우리, 꼭 애 낳을 필요 있을까?"라고 언젠가 경환이 더이상 자식을 볼 마음이 없음을 밝혔을때 상희는 너무나 서운해서 이 만남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지만 이후로 일상이 모두 얼그러져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사흘뒤 경환으로부터  걸려온 만나자는 전화는 그동안 그에 대한 원망을 모두 잠재우고도 남을 만큼의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럼 딱 하나만 낳자. 딸이면 좋겠는데"라는 경환의 전향적 제안에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였다.

사별자 안엔 절대 치워지지 않는 단단한 방이 하나 있다는 얘길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상희는 그래서 처음 대학 선배가 경환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 좋은데 사별자라는 말을 했을때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끝내 이혼도 아닌 사별로 홀로 된게 죄는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둘은 만나게 되었다.


첫만남때 경환은 못박듯 아이 완의 이야기를 하였다.

"난 애를 위해서는 뭐든 합니다. 완이 잘 키워줄 여자 필요합니다"라는 그의 말이 전혀 거부감 없이 들렸고 오히려 그런 그의 부성애에 상희는 감동받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만난 지 석달만에 당일치기로 다녀온 여행지 페션에서 둘이 첫밤을 보낸 날 상희는 경환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는 상희가 먼저 , 죽은 전처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자 경환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더니 되물었다. "완이 엄마 노릇할 수 있어?"라고.


완은 예상대로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였다. 아기때 엄마를 잃었으니 딱히 죽은 엄마 때문은 아닐테고 그냥 숫기가 없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데면데면해하는 완을 보며 경환은 사뭇 심각해하는데 상희가 사온 티라미슈 케익을 완이 정신없이 먹어치우는걸 보고는  경환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맛있다"하며 입가에 케익을 잔뜩 묻히며 아이가 맑게 웃을때 상희는 마치 자기 배로 낳은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경환과 결혼해서 이쁜 여동생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하였다.


납골묘에서 완의 생모를 보고 오던날 경환은 얼굴이 어두웠다.

"왜?"

"아니..명절 다가오잖아"라며 경환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만난 초기 어느 명절에 경환은 '어디좀 다녀와야 한다'며 명절에 만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긴 상희는 뒤늦게 그가 옛처가에 다녀온 걸 알고는 당연히 갈 곳을 갔다왔다고 생각하였다. 사별자를 만나기로 하였으면 그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런 의중을 내비치자 경환은 그 다음부터는 떳떳하게 '처가에 간다' 하고 드나들곤 하였다. 그래도 상희는  이해하려 하였다.


"이번 명절에 거기 가지?"

나흘 연휴가 코앞에 다가왔을 떼 상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야지 당연히"라며 경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일날 가? 아니면"

"그냥 당일 하루. 가서 점심이나 저녁먹고 오는거지 뭐"라는 그의 말에 상희는 그 다음날 자신의 부모에게 경환을 소개시켜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왜? 왜 그걸 물어?"라는 경환의 물음에 상희는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실없긴.."하고 경환은 상희의 집 앞에 차를 갖다댄다.

"명절 잘 보내고 연락하고"라며 상희가 그의 목에 두팔을 두르자 경환은 "누가 보면 어쩔라구"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게 긴 입맞춤을 한 뒤 상희는 차에서 내렸다.



당일엔 옛처가에 간다고 했으니 그 다음날로 상희는 날을 잡았다. 상희 부모는 상대가 사별남이라는 말에 그래도 이혼남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라도 마흔 다 된 딸을 치울 수 있다면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경환은 견실한  사업가여서 머곡 살 걱정도 할 필요 없었고 아이 완도 상희를 잘 따른다는 말에 더더욱 안심을 하였다.

상희는 어서 명절 당일이 지나 경환을 집에 인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경환은 명절 당일이 다 가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상희가 보낸 메시지도 하루종일 열리질 않았다. 가서 한끼 간단히 먹고 온다던 그의 말대로라면 저녁쯤이면 집에 왔어야 하는데도 그는 그날밤까지 아니 다음날 정오 무렵까지도 상희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고 전화 한통 없었다.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에게 청혼까지 한 경환의 이런 태도는 상희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해서 상희는 다 저녁이 돼서 용기를 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벨이 서너번 울리자 전화는 음성 사서함으로 돌아갔다. 가끔 화장실에 있거나 전화받을 상황이 아니면 그가 전화를 이런식으로 돌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무감하게 넘어가지질 않는다. 처가도 다녀왔을테고 지금쯤 집에서 쉬고 있으면서 자기 전화를 이렇게 거절한다는 게 상희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았다. 발끈해진 상희가  다시 전화를 하자 이번에도 역시 한두번 벨이 울린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뭘까 이 시그널은?


그러는데 그녀의 메시지 앱에 빨간 숫자1 이 떴다. 상희는 다급히 메시지 창을 열고 그가 보내온 메시지를 읽는다. "가만좀 있어 . 처가야 아직"이라는  경환의 메시지에 상희는 아득해진다. 어제 가서 밥 한끼 먹는다더니 그럼 거기서 잤다는 얘긴가...


상희는 메시지 창을 열어놓은 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늦어져서 잔거겠지 하고는 답문을 찍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라고.

그러나 그 메시지 역시 몇시간 동안 읽히질 않더니 자정이 다 돼서야  '읽음'으로 떴다. 상희는 온몸이 달아 그의 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날밤 경환은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았고 상희의 부모는 상희가 애써 경환의 편을 들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둘러대자 손사래를 치며 그만두라고 하였다.



"나야 . 왜 연락이 없어?"

이틀 뒤 상희가 퇴근무렵 그의 회사로 찾아가서 꺼낸 첫마디였다.

"부모님, 기분 많이 상하셨겠다"라며 그가 상희의 반응을 살핀다.

"이런 생각했어...당신이 아직도 완이 엄마 못잊어 한다는"

"그런거 아냐...그게 언제 얘긴데..."

"근데 왜...그냥 밥 한끼 먹는다면서"

"그건 니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그 말에 상희는 입이 떡 벌어진다. 처음으로  조경환이라는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짧지 않은 순간을 알아온 사인데도 그가 멀게 느껴졌다.

"우리, 결혼할 사이 아냐? 그걸 전제로 만나온 거 아니냐구"

상희가 조금 격앙돼서 말하자 경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짜증이 난다는 투다.

"뭐야 그 표정은?"

"너랑 결혼한다고 해서 죽은 애엄마랑 남이 되는건 아냐"

이 말을 상희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갈등이나 싸움 끝에 헤어진 사이가 아니어서 정이 있을 수 있다 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뭐야 그럼...난 뭐야?"

"내가 얘기했잖아. 우리  완이 키워줄 여자 필요하다고"

상희는 더이상 그와 마주 앉아 있는다는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나도 부모님 계셔!"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일방적으로 약속 정해놓고 나보고 맞춰라? 그건 아니지"라며 그가 답답해하며 넥타이를 느슨히 한다.

상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래다줄까?"

마치 둘 사이에 아무일도 없다는 듯  경환은 앞장 서서 까페를 나간다.



경환의 차는 잠시 상희의 뒤를 따르는가 싶더니 어느 시점 부턴가 상희의 시야를 벗어나 보이질 않았다. 꿈이었어...다 꿈이었어..하는데 어디선가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 상희는 힐끔 고개를 돌린다. 보행 신호가 바뀐것도 모르고 횡단보도 한가운데  멀뚱하니 자신이 서있는걸 깨닫기까지 상희는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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