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영 Feb 15. 2024

그림자

"너도 참 딱하다"

전화너머에서 혜경은 끌끌 혀를 찬다.

"그래. 누가 이해하겠어"라며 수진은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나자 자기도 모르게 휴, 한숨이 나온다.



경호와의 지난한 연애를 딱 끊어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경호의 처참한 현재상태를 감안하면 그리 할 수도 없다. 아직 결혼을 한것도 양가에 정식으로 소개를 한 사이도 아니지만 둘은 암묵적으로 결혼으로 가고 있는것이라 믿어왔고 그게 아니라 한들 지금 상태의 경호를 내칠 수는 없었다.



경호는 결국 마지막이라며 들어간 직장에서마저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사장과 싸우고 뛰쳐나왔다. 물론 월급은 한푼도 받지 못한채. 소액재판을 건다는 그를 수진이 간신히 설득하고 그만큼의 돈을 그의 통장에 입금함으로서 일단락 되긴 하였지만 누가봐도 의지가 되거나 미래를 함께 할 상대가 아니라는건 여러번 확인된 셈이었다.

수진의 이런 연애사를 아는 친구 몇은 한사코 둘의 관계를 뜯어말렸고 수진도 여러번 그와 헤어지려 하였지만 경호쪽에서 놓지를 않았다. 하기사 지금 ,세상의 유일한 의지처인 수진을 놔버리면 그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넌 현금 인출기일 뿐이야"라는 친구들 말에 수진은 딱히 반론을 펼수가 없다.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한 빚더미,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들어간 직장마다 상사나 동료들과의 불화, 연이은 퇴사...

수진도 이 관계를 놓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어 차마 '끝'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있던 자리에 이젠 연민만이 고독하게 톼리를 틀고 있다.


이제 그의 월세를 입금해줘야 하는 시기다. 매달 15일.  25일이 월급날인 수진도 15일이면 한참 돈이 궁할 때다 그래서 가끔은 현금서비스를 받아 경호의 월세를 대주곤 하였다. 이번달 역시 경조사비의 여파로 돈이 모자란다. 수진은 별수가 없어 슬리퍼를 끌고 어두워진 거리로 나선다. 편의점 atm을 이용할 생각이다.



그렇게 그녀가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저만치서 가로등 하나가 깜박거린다. 전구 수명이 다 한듯 하다. 몇개 안되는 가로등이어서  좁은 골목은 으스스하기만 하다. 그때 뒤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남자의 발굽소리다. 수진은 벽쪽에 바싹 붙었다. 그러자 뒤의 발소리도 끊어진다. 수진은 양손을 꽉 움켜쥔다.



경호는 계속해서 수진의 입금여부를 확인해보지만 돈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전화를 할까 하다 그는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한다. 냉장고에서 남은 캔맥주를 꺼내 들이켜보지만 이미 김이 다 빠져 맛이 없다. 그는 남은 맥주를 싱크대에 콸콸 붓는다. 하루종일 잤으니 잠이 올리도 없고 해서 그는 산책을 나가기로 한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밤이면 꽤 냉기가 느껴진다. 그는 가벼운 점퍼 하나를 걸치고 방에서 나간다. 그리고는 3층 계단을 두벅뚜벅 걸어 내려 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자기를 뒤따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늦은 시각에 자기말고 또 잠을 설친 사람이 있나보다, 하고 계단 한쪽에 붙어 길을 내주지만 지나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뭐지?하고 그는 뒤를 돌아다본다. 아무도 없다. 텅빈 계단뿐이다.


그날따라 달이 밝기만 하다. 택시로 5000원이면 가는 거리니 이 참에 수진에게 가볼까, 가서 직접 월세를 타올까, 생각하던 그의 눈에 마침 저만치 빈택시가 달려온다. 그는 손을 들어 택세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그 택시는 그를 보고 멈추려는듯 하다 이내 도망치듯 지나쳐간다. 분명 빈차였는데 승차거부를 당하자 경호는 화가난다. 멀어져가는 택시 꽁무늬의 차번호를 적을까 하다 그만두고 그는 다음 택시를 기다린다. 그러나 늦은 시각 주택가라 차가 없다.

차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다시 입금 여부를 확인하지만 수진으로부터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잊어버렸나?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저만치 또다시 빈택시가 오고 있다.  이번엔 서겠지,하고는 그가 손을 들자 차는 스르르 미끄러져온다 . 거의 멈춘 차의 뒷문을 열려는데  차는 다시 빠르게 그를 버리고 도망쳐간다.



경호는 통 영문을 알수가 없다. 그는 자기 차림새를  훑어본다.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얇은 점퍼를 걸친. 그렇다고 딱히 불량배나 취객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택시들은 그를 태우기 직전 다들 가버린다. 이게 뭘까...하는데  뒤에서 꺅! 하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경호는 소리난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자 초로의 여자 하나가 경호를 보며 뒷걸음치는게 보인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뒤에...뒤에.."라는 그녀는 신고 있던 신발 한짝이 벗겨지는것도 아랑곳 않고 저멀리로 도망가버린다.

경호는 아무래도 자신의 어딘가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주는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하고 그가 몸을 돌리는데 "가려구?"하는 수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하고 그가 돌아보자 수진이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다.

"웬일이야...잊은건 아니지? 월세.."하는데 수진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온다.

"얼른 줘"하고 그가 손을 내밀자 수진은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장난은...직접 주려고 온거야? 자고 가 그럼"하고 그가 수진의 팔을 붙드는 순간 그녀의 트레이닝 바지가 유난히 헐렁한게 눈에 띈다. 며칠 안 본 사이 말랐나, 하고 그가 그녀의 바지에 손을 대려 하자 수진이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더니 "배고파"라며 나직이 말한다.

"나도 배고파. 근데 문 연 데가..."하는데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배고파서 우는거야? 그정도로?"

"..."


경호는 힘이 하나도 없는 그녀를 부축하다시피  자기 방으로 들어온다.

"라면밖에 없어"

그러자 수진이 맥없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김치가...."하며 경호가 냉장고문을 열려하자

"김치 없어도 돼"라는 수진의 말이 들려온다.

"똑 떨어졌네"하고 그가 냄비에 물을 받는데 갑자기 뒤가 으스스하다. 냄비를 가스 레인지에 얹고 불을 키려는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싸한 냉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는다. 너 수진이 아니지? 하고 뒤를 돌아보자 방안은 텅 비어있다.



그때 띠링,하고 입금 알람이 울린다. 설마,하는 눈으로 액정을 확인한 그는 정확한 월세비가 입금된 걸 확인한다. 그러나 송금인의 이름이 기재돼 있지 않다. 이런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순간 가스불 끄는것도 잊어버리고 밖으로 뛰여나간다. 그리고는 계단을 날듯이 뛰어 내려와 사라진 그녀를 찾아헤맨다. 맨발로 길거리를 헤매며 수진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불러대는 그를 취객 두엇이 보고는 손가락질 하며 시시덕거린다.


all pics from google





yes24, 알라딘에 종이책 떴습니다. 교보는 내부사정으로 다소 지연예정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