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이 일어난지 반백년도 훨씬 지났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바라는 탄원이 줄을 잇고 있다. 그중에 널리 알려진 사건이 1950년 7월,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아닌가 한다.
전쟁과는 거의 무관할 정도로 평화로운 노근리에 어느날 마을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피난길에 나선다. 하지만 철로위에서 난데없는 미군의 사격을 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생존자들은 굴다리 밑으로 숨어들지만 그들을 향한 미군의 조준사격은 계속된다. 그들은 이해할수가 없다. 우방인 미군의 조준사격을.
굴다리 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 그 아이의 울음소리에 덩달아 우는 아이들의 소리가 미군을 자극한다는 원성에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작은 연못에 수장해 침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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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과, 보상의 요구 또한 오래 지속되었으나, 1999년이 돼서야 미국의 한국전 당시 공식문서와 참전미군들의 증언으로 입증되었고 이후 2004년에 이르러 노근리사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저들은 무고한 양민입니다. 그래도 계속 사격을 합니까?'라고 묻는 미군이 상부에 항의하는 대사가 나온다. 그당시 상부에서 떨어진 지시는 '민간인 500명을 학살'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노근리 사건과 요즘들어 함께 거론되는 사건이 이야포, 두룩여 민간인 피폭 사건이다. 둘의 성격이 꼭 같다고는 할수 없지만, 둘다 미군의 분명한 '양민 조준 사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나마 노근리 사건은 이제 정부, 미국 차원에서 인정받았지만 이야포, 두룩여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생존자마저 단 한명으로 축소돼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영화자체로 돌아가서 보자면, 이야기의 명암을 대비시키기 위해 전반부는 평화로운 마을전경, 중반이후부터는 무자비한 학살씬, 그리고 그해 가을 다시 돌아온 평화로 요약된다.
일종의 저항 영화로 불릴수도 있어 재미적인 측면을 논하기 뭐하지만 전반은 좀 식상하고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은 대신 중반 이후의 긴박한 피격씬의 연결은 대단한 울림을 선사한다. 그런 맥락에서 후반 짧게 인서트형식으로 보여지는 가을의 평화가 사족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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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하는 미군 스스로도 이 조준사격이 오류임을 알았다는 자체가 명백한 전뱅범죄이며, 그렇다면 그걸 감행한 미국의 속내는, 이야포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 <두소년>을 펴낸 작가 양영제의 주장대로, 미국의 방산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계략이었을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더 복잡한 정치적 속내가 있을수도 있지만 그렇게 마구 퍼부어댄 총알 한발한발이 결국은 미국의 방산산업을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억측일까?
전쟁만큼 부조리한 인간의 게임도 없다. 그것은 소수의 기득권에 의한 버튼누르기 게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다.
위에서도 언급한것처럼, 아이의 울음소리때문에 다른이들이 위험해지자 아이를 수장시키는 부모의 심정, 그것이 전쟁이 가져오는 인간성의 말살이며 보상과는 무관한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교, daum
나라가 힘이 없으면 한국전같은 대리전의 희생물이 되는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고 여론의 분열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소수의 위정자, 기득권들에 의해 나라는 늘 갈라지고 이런저런 포퓰리즘에 대중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의료대란같은 내전도 발발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끼리 서로를 조준사격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쪽에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주장하는것 또한 전쟁범죄외 크게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작은 연못>이 백만, 천만을 동원한 인기몰이를 한것은 아니지만, 우방이란 것에 대해, 우리에게 미국이란 어떤것인가에 대해 ,국제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성의 부조리함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케 하는 분명한 계기는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