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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흐린밤의 연가>

너무도 그리운 몸짓을하며 그대는 온다.

by 박순영

비가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오래전 잠깐 잡지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취재한 시인a다. 그는 당시 학교선생님을 하면서 시를 썼고 문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가던 중이었다. 비오는밤의 서정을 유려하게 풀어쓴 시가 있는데 당시엔 전문을 외우다시피 할만큼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시였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다소곳한 그의 아내가 먼저 나를 맞아주었고 그는 서재에서 소탈한 차림으로 나오며 내게 인사했다. 멀리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기자님. 하면서.

그리고는 다과를 대접받고 한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자기가 쓰는 시만큼이나 조곤조곤,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했고 선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 집을 나설 즈음 그는 내게 '거마비'명목으로 돈이 든 봉투를 건넸고 나는 물론 사양했지만 받아도 된다며 한사코 주는 것이었다. 결국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진기자와 그의 집을 나섰다.



그러나 회사의 사정으로 그의 기사가 예정돼있는 호를 발간하지 못했고 그렇게 지연이 되는 동안 그는 내가 취재를 나간 사이 몇번 전화를 해서 자신이 실린 잡지가 언제 나오냐고 여러번 물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뒤늦게라도 내가 콜백을 해서 회사 사정을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난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니 비겁했다.



자기 시 중 유독 아낀다는 그 비오는 밤 관련시를 구절구절 해석해주며 음미하던 그 선한 눈빛을 여전히 잊을수가 없다. 그 시는 마치 데카당파의 한 시인이 쓴 시처럼 깊은 우울과 삶의 허무가 적절히 조화를 이뤄 오랜 여운을 남기는 그런 시였다. 역시 시를 쓰는 사람은 산문을 쓰는 나와는 결이 다르구나, 느끼게 해준 그런 시였다.



결국 그 잡지는 폐간을 했고 이후로 나는 번역일로 , 이후엔 방송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거마비만이라도 돌려주었어야 하는걸, 난 다른 기자들과 술판을 벌이면서 다 쓴것 같다.





지금 검색을 해보니 1943년 생인 그가 아직 생존해있다. 여간 고마운게 아니다.

무명 잡지 기자라고해서 전혀 홀대하지 않고 진지하고 정중하게 맞아준 그에게 내가 한짓은 매은망덕,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건 때가 있는 법이고, 나는 '사과할 타임'을 놓쳤지만 이렇게나마 내 사죄의 마음을 전하려 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 거마비도 돌려주고.

당장이 힘들고 버겁다고 도망치고 회피해버리면 그건 반드시 부머랭이 돼서 내게로 돌아와 내 심장을 꿰뚫는다. 이것이 삶의 이치임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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