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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y 10. 2023

소설 <그의 흔적>



분명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소파밑에 그의 양말이 말린채로 들어가있는걸 보고 미소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다. 하기사 살면서 한번 놓여진 소파를 옮길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양말 냄새를 맡아본다. 텁텁한 먼지 내음만 묻어나온다.



미소가 집 뒷산을 간만에 올라갔던 날이다 .기석은 생전 안하던 전화를 다해 "오늘 간다. 술상 봐놔라"했다. 술상? 내가 무슨 접대부도 아니고...미소는 마음이 상한걸 애써 감추며 몇시에 올거냐고 묻자 그는 ,봐서,라고 하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그와 미소의 관계는 늘 이런식이었다. 언제나 그가 주도하고 미소는 그가 시키는대로 해야만 이어지는 그런 관계 . 또다시 그런 연애를 하라면 돈을 줘도 못하리라...



기석은 그날밤 9시가 다 돼서야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5분 있음 도착"이라는 짤막한 메시지를 받고 미소는 차리던 저녁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카디건을 걸치고 달려나간다. 그러자 저만치서 기석의 흰색 경차가  언덕길을 올라와 막 커브를 틀고 있다. 미소는 손을 흔들어보이자 그는 미소 바로 앞에  차를 세운다.


"나가서 먹자"

기석은 차문을 닫으며 그리 말한다.

"술상 봐노라며"

미소는 그가 또 변덕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먹자고 팔을 끈다

"집에서 무슨 술 맛이 나"

하며 기석은 저벅저벅 조금전 올라온 언덕길을 앞서 내려간다.


아까 뒷산에서 그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산을 내려와 제육볶음에 그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나물무침과 계란찜을 해놓고 소주를 한병 사다놨다. 그렇게 다 준비해놨는데...


늘 그런 식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건 책임을 지는 법이 없는.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대로 변덕을 부리고 거기 동조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관계를 뒤틀어버리는 그런 타입이었다 기석은.



미소는 이미 멀리 가버린 기석의 뒤를 뒤늦게 따라 가기로 한다.

정문 언덕길은 경사가 급해서 겨울이면 올라오지 않으려는 택시기사들까지 있다.

"야, 넌 이런 데 사냐"

처음 그가 언덕을 운전해 올라와서는 내뱉은 첫마디얐다.

그 언덕길을 기석은 이제 익숙한듯 날듯이 내려가고 있다. 그뒤를 넘어질세라 몸을 사리며 미소가 뒤따른다.


"저희 영업시간 30분밖에.."

라고 식당 주인은 둘이 나가줬음 하는 눈치를 보이지만 기석은 그말을 무시하고 구석자리로 가서 앉는다.그러자 주인은 애원하듯 미소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저희 조금만 있다 나갈게요"


삼겹살을 구우며 기석이 말한다.

이번에 강연차 다녀온 w시에서 한 여자를 만났노라고.

여자라는 말에 미소는 긴장한다.

"예전에 공동집필 하기로 한 작간데..그때 일이 좀 있어서 하다 말았거든.."

아, 작가였구나...미소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말로는,다른 여자 따위는 없다고 하지만 기석은 미소가 옆에 있어도 개의치 않고 여자들과 장시간 전화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런 기석에게 다른 여자가 덦다고 믿기지가 않는다 미소는.


"실은 제육볶음에 자기 좋아하는 된장"

"뭐?"

"아냐...고기 다 익었네"

둘은 말없이 구워진 삼겹살을 먹기 시작한다.

"그 여자가 친구를 데리고 나왔드라구.."

"..."

"근데 나보고 그러드라. 선생님은 왜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미소는 그 뒷말이 궁금해진다.

"내가 말이 거칠대. 상대방 배려를 안하고."

그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잘 봤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한기석 사전에 '배려'라는 말은 아예 없다는걸 미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늘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그러면서 상대에게 상대방 배려를 할줄 모른다고 타박을 하는...저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그러면서도 이 끈을 놓을수가 없다...


그러는데 기석이 시간을 힐끔 본다.

"아까 30분이라고 했나?"

"응...좀있다 나가야 돼. 이거 싸 가자"

"뭘...다 먹어 천천히"

그말을 지나가던 주인여자가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린다.

"저희 좀 있음 나가요"

미소가 주인여자를 향해 말한다.

"야, 우리 돈 내고 먹는건데 넌...죄지었냐?

이 남자와는 대화자체가 안된다고 느끼는 경우가 허다했다. 온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남자.



그렇게 한시간을 끌다 둘은 식당을 나온다.  앞서 가던 기석이 힐끔 돌아보며,

"다시 가서 커피 뽑아와"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미소는 못들은척  기석을 지나쳐 언덕길로 접어든다. 그러자 기석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야, 커피.."

"당신이 뽑아다 마셔 그럼!"

미소도 더이상 참을수가 없어 그렇게 소리치고 만다. 기석의 동공이 커지더니

"너 많이 컸다'라며 불량스레 웃는다.

"잠깐만...'  하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당긴다 . 그러나 라이터가 수명이 다했는지 몇번을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자 그는 미소에게 근처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사오라고 시킨다. 미소는 그말도 무시하고 언덕을 계속 올라간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기석의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애써 무시한다. 그러자 기석이 어떻게 불을 붙였는지 담배를 태우며 빠른걸음으로 그녀를 따라붙는다.


"화났냐?"

"집에 제육볶음이랑 된장.."하는데  미소는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기석은 딴에 다급했는지 반도 안태운 담배를 눌러끄고 미소 옆으로 바투 다가선다.

미소가 울먹인다.

"술상 봐노라고 해놓고"

"술상? 무슨 술상? 내가?"

 남자가 치매인가 싶어 미소는 눈물이 그렁한 눈을 치켜뜬다.

"녹음 들려줘?"하며 미소가 전화액정을 누르려하자 기석이 막는다.

"그랬구나 내가...내가 뭐라구..미안."

미안..

기석을 사귀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본 말이다. 그 미안이라는 말이.



그렇게 집에 들어왔지만 둘은 데면데면했고 소파 테이블 가득 놓여있는 제육볶음을 비롯한 음식들을 보며 기석은 난처해한다. 설령 자기가 진짜 그런 말을 했어도 농담으로 들었어야지,라며 미소의 속을 긁는 말만 계속 해댄다.

"양말 벗겨라"

그가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말한다. 늘 이런식이다. 오면 소파를 다 차지하고 누워버린다. 그리고는 양말 벗겨라, 다리를 주물러라...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잘좀 주물러,가 그 신호였다. 섹스를 하자는...


미소는 저녁상을 물리고 물티슈로 소파테이블을 닦는다. 넌 행주 안쓰냐? 그가 누워서 힐끔거리며 뱉는다. 누가 요즘 행주를 써? 걸레도 안 써. 다 물티슈 쓰지,하며 미소는 보란듯이 바닥까지 물티슈로 박박 닦는다. 그런 미소를 물끄러미 보던 기석이 툭 내뱉는다.

"너 나 좋아하냐?"

그말에 미소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여태 둘이 해온 짓거리는 무엇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이 짓거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해서 똑같은 질문을 기석에게 한다. 자기를 좋아하냐고. 그러자, 내가 먼저 물었잖아 하면서 피곤한 기색을 하며 한팔을 접어 얼굴위에 얹는다.

이 남자의 어디에 난 끌린걸까...

전작이 있어선지 기석은 이내 곯아 떨어졌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 사이 , 아까 벗긴 양말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찾으면 나오겠지...


미소가 주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기석이 "다리 주물러"하고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그녀의 손은 그의 종아리를 허벅지를, 그리고 페니스를주무르고 지퍼를 내리고 둘은 한몸이 된다..


"지금 이상황으로는 안되겠다"

다음날 새벽, 옆에서 자고 있는 미소를 흔들어 깨우며 기석이 말한다. 헤어지자고.

벌써 몇번째 이별인가....미소는 그가 농을 하는 것이려니 하지만 전과는 달리 그의 표정이  너무나 굳어있고 결연함마저 엿보인다.

"돈이 뭔데..."

"넌 이렇게 집이라도 있지 난..."

기석은 셋방에서 아들과 살고 있다. 전처가 키우다 재혼한다고 다시 데려온 그 어린 아들 환과..

"환이 깨기전에 가봐야 돼"하며 그가 두리번두리번 양말을 찾는 시늉을 한다.

"지금 양말이 문제가 아니잖아!"

미소가 울먹거리자 그는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니

"그럼 맨발로 가지 뭐."하고는 맨발로 현관으로 향한다.

"가지 마"

미소가 뒤에서 있는 힘껏 껴안지만 그는 그런 미소의 팔을 풀고 현관문을 열고 나선다...



그뒤 두어번 그에게서 생활고를 비관하는 메시지가 왔고 미소는 더이상 상처받기 싫어 답을 안했다. 그리고는 한달 후 그의 부고가 포탈에 뜬걸 미소는 우연히 보게 된다. "소설가 t씨 자택에서 극단선택"이라는...



미소는 이제는 유품이 돼버린 양말두짝을 품에 꼭 안는다. 그때 그를 말렸어야 한다, 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한다는 회한이 그녀의 온몸을 관통한다.

그렇게 한참을 양말을 끌어안고 있던 미소는 양말을 정성껏 손빨래해서 욕조턱에 걸쳐놓는다. 그리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올려 포니스타일을 만들어 핀으로 고정시키고 서둘러 장을 보러 나간다. 그가 오기전에 제육볶음을 해놔야 돼,라며 중얼거리며...




Gymnopédie No. 1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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