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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y 23. 2023

 소설 <흐린날의 달리기>

성준은 지금 우체국이라며 w시에 보낼 책을 박스포장중이라고 답문을 보내온다. 향미는 순간 여자에게 가는 책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언제부턴가  그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니체며 까뮈책을 찾아댔고 해서 향미가 인터넷 온라인 서점에서 몇권을 보내준적이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w시에 내려가야 한다며 이번에는 오래 걸릴거라 했다.


향미는 그가 또 w시의 역사와 관련된 강연을 하러 가려니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딱히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향미 옆에서 누군가와 열심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하는가 하면 실망을하고 그럴때면 향미에게 곧잘 거칠어지곤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강퍅한 성격탓으로 돌렸지만 그렇게 단순히 보아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w시에 다녀온 지 보름도 안돼 다시 내려가봐야 한다고 해서 향미는 그에게 그 이유를 따져물었고 그러자 성준은 남의 사생활에 참견말라며 그런 그녀를 무시해버려 둘은 헤어졌다.


그러나 한달도 안돼 성준은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고, 둘이 헤어졌다 다시 붙는거야 늘 해온 짓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향미에게 잘 해주는가 싶더니 얼마전부터 또다시 w시 타령을 하며 이번에벤야민과 하이데거 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좀 사봐"

"야, 작가가 무슨 돈이 있어. 좀 보내주라"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교양프로 작가일도 그만 뒀고 이제는 중고생 과외 근근이 버티는 향미에게 책으로 수십만원을 쓸 여력이 없었지만 어차피 결혼하게 되면 자기 책도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번에도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연락없이 잠잠해서 향미가 메시지를 보내자 이제는 w시에 보낼 책을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여자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번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그는 늘 여자문제로 향미의 속을 긁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불고가는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돼 그녀는 어느날 자기 방에서 잠에 골아떨이진 성준의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몇번의 시도끝에 잠금장치는 렸고 메시지창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떠있었다.



과연 이중의 누굴까 하다가 나이 서른 정도의 여자 하나를 클릭했더니 이런 대화가 오갔다.

"시지프스를 여태 안읽는게 어딨어 . 빨리 읽어봐"

"시지프스? 그게 뭔데?"

"자기 작가 아냐? 그런데 여태 까뮈를 몰라?"

이런식이었다. 그래서 지난번 까뮈를 그리도 급하게 사달라고 한거였구나 하니 향미는 그책을 사준 자기가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성준이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고 자기의 휴대전화를 향미가 본걸 알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여자문제를 알면서도 속앓이만 하던 예전의 향미가 더이상 아닌걸 알고 그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야 너만 보고 살아야 해?"라며 휴대폰을 낚아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10층에서 내려다보는 눈 내리는 한겨울의 아파트 단지는 스산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도 밤새 내린 눈은 많이 잦아들어 이제는 흩날리는 정도였다. 그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태우는 성준을 부감으로 내려다보자니 향미는 그깟 정신적 외도 정도가 뭐가 대수랴 하는 생각에 그를 몰아댄 것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그여자와 '깊은 관계'도 아닌것 같고 서로 책이야기며 철학이야기를 하는 정돈데 그걸로 트집을 잡는다는것도 우스웠다. 해서 향미는 식탁의자에 걸쳐진 성준의 점퍼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 그의 등을 덮어준다. 그러자 성준은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 돌아서며 ,미안해,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러지 않겠다고...



그러던 어느날 성준은 지금 급히 공동작업에 들어갈 글이 있다며 전처럼 자주 향미를 찾지는 못할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순간 그 공동필자가 '그녀'라는 직감이 들어 그날 향미는 과외가 끝나고 오는 길에 소주를 진탕 마시고 그의 방으로 쳐들어가다시피 했다. 밤늦게 향미가 그것도 술에 취해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성준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고 향미는 다 끝내자며 그의 가재도구를 마구 부수고 던져대기 시작하였다. 성준은 취했으니 일단 자라며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는 침실문을 밖에서 잠그기까지 하였다.

다음날 아침 심한 메슥거림에 눈을 뜬 향미는 문을 열어달라고 밖의 성준에게 애원하였고 그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문을 열었고 그녀는 그길로 화장실로 향해 지난밤 먹은걸 모조리 게워냈다.

"니가 정 힘들면 그만둘게 공동작업"

향미는 의외로 그가 쉽게 굴복한다는 느낌에 오히려 미덥지가 않았다.

"정말 공동작가 그 이상은 아닌 관계야"라며 그는 토사물 잔해가 묻은 향미의 입가를 물로 닦아주며 달랬다. 더 따진다고 당장 해결이 날것도 아니고 해서 그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내일 집에 올래? 당신 좋아하는 아구찜도 같이 먹고 "

다음날은 향미가  과외가 없는날이기도 해서  그에게 오라고 했다.  아구찜이라면 언젠가 둘이 w시에 내려가 저녁으로 함께 먹은 기억이 있다. 어릴적 목에 생선가시가 걸려 생선자체를 싫어한 그녀인지라 아구찜은 거의 성준의 차지로 돌아갔지만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흡입하듯 먹어대던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  하였다.

아구찜이라는 말에 성준은 상기되는 눈치다.



다음날 성준은 정오무렵 향미네 도어락을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러고보니 성준이 오랫만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캐주얼 셔츠에  진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유명 셀럽을 연상시켜 향미는 쿡, 하고 웃었다.

"왜 웃어?"

"아니. 귀여워서"

"이게...."

그렇게 둘은 토닥거리다 곧바로 단지 근처 새로 생긴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막 손님들이 몰려나갔는지 직원들은 저마다 흐트러진 테이블을 정리하기 바빴다. 그중 구석자리를 잡아 향미와 성준은 마주보고 앉는다.

"그래서 책은 잘 받았대?"

주문한 아구찜이 나와 향미가 한점 떼어물며 물었다.

"응 ? 아...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보낸거야. 지금은 절판돼서  내거 보내준거야."

"그러다 자기가 필요하면 어쩔라구"

그말에 성준은 대답을 않는다. 책이라면 끔찍히 아끼고 찾고 모아대는 그가 희귀서적을 덜커덕 보낼 정도면 상대가 여자임이 분명하다...그순간 향미의 목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진다. 가시....



순간 향미는  앞이 노래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릴때 향미의 목에 걸린 가시를 없앤다고 향미 엄마는 밥을 한움큼 삼키게 했고 물을 한대접을 먹였지만 그 통증은 가시질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정도 일로 병원을 찾는다는 인식이 없던 때라 향미는 몇날 며칠 그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흐른후, 더이상 목이 아프지 않다는걸  느꼈고 안도를 했지만 이후로 생선이라면 손사래를  다.

특히 아구찜은 온통 가시 투성이 아닌가. 아구찜이라면 속된말로 환장을 하는 성준과 자신은 이런 면에서도 악연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우리 결혼, 안해?"

아구찜을 흡입하느라 정신없는 성준에게 그녀가 결혼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뭐?"

그가 놀란 토끼눈을 하며 그녀를 예리하게 쳐다본다. 같이 살자는 이야기는 몇번 오갔지만 정작 결혼이란 단어는 처음 듣는터라 성준은 황망해하는 눈치다.

"내 형편이 지금"

"그거 다 핑계 아냐? 뭐하면 지금 내 집에서 지내도 되고..."

"그래도 내 벌이가 있어야..."

"싫음 관둬"

라고 그녀는 들으라는듯 켁켁 댔다. 잔가시일수록 통증이 예리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는 성준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두고보겠다는 포즈를 취한다. 그러자 성준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킨다. 그리고나서는 몰골이 엉망이 된 아구찜을 한참을 들여다본다.

"결혼같은거 생각도 안해본거지?"

향미가 체념하는 투로 말하자 성준은 그제서야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랑 살 자신 있어?"

"몰라..."

"그러면서 결혼은.."

향미도 자신이 왜 갑자기 결혼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수가 없다. 여자문제, 그의 가부장적 태도, 심한 변덕에 질려 이미 처음 성준에게 가졌던 뜨거운 열정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인데도 왠지 결혼이란걸 한다면 이 남자와 해야겠다는 이 모순된 감정의 기원을 알수가 없다.

"그래, 우리 그냥 지내자 지금처럼"

"싫어"

성준의 의외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이 된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하고 성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계대로 간다.

"내가 사주기로 했잖아 "하면서 향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 했지만 성준은 그런 그녀를 제지하고 꼬깃꼬깃한 현금으로 그 비싼 아구찜을 계산한다. 그의 그런 뒷모습을 보면서 향미는  괜히 결혼이야기로 이 남자 마음을 다치게, 무겁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식당을 나와서도 둘은 일정 거리를 두고 걸었다. 계속 목이 아파서 켁켁대는 향미를 성준은 힐끔힐끔 쳐다본다.

"병원갈래?"

"좀 있어봐...옛날에도 이러다 내려갔어"

"바보..."하면서 성준이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온다. 오랫동안 그와 연애라는 걸 하면서 한번도 그가 먼저 손을 잡아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스친다..그런데 하필 이런 어색한 순간에...

그녀의 손을 쥔 성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구리반지도 괜찮은거지?"

난데없이 그가 그렇게 물어온다.

"반지?"

하는데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내린다.

"미안해...당신 의심했어"

"내가 잠깐씩 흔들린건 인정해. 하지만 결혼이란걸 해야 한다면"

"그건 나라구 생각한거야? 정말이야?"

"응"

그 순간 향미는 행인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그의 가슴을 파고든다.

"야, 길거리에서 이럼 어떡해"라고 성준이 타박하지만 향미는 더이상 타인의 눈길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다.

그렇게 둘은 한참 서로를 안은채 서 있다 눈에 들어오는 보석상으로 들어간다.




쇠락한 동네에나 있을법한 그런 보석상이다. 시트가 다 찢어진 간이 소파며 수십년전에나 팔렸음직한 조악한 플라스틱 시계며 뻐꾸기 시대가 떡하니 자리 한....

"결혼인가요, 약혼인가요"

라며 초로의 주인이 둘에게 물어온다.

성준은 대답않고 유리케이스안에 진열된 반지들을 바라보다 하나를 가리키며 어떻냐는 눈빛을 향미에게 보낸다. 향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목이 자유로워지는걸 느낀다. 그새 가시가 내려갔나...

"딱 맞네 . 조절할 필요도 없겠어"라며 주인은 성준이 고른 반지를 그대로 케이스에 담는다.


가게를 나서는데 곧 비를 몰고 올 훈풍이 몰려온다.

"뛸까?"

"응"

그렇게 향미는 중지에 반지가 끼워진 자신의 왼손으로 성준의 오른손을 잡고 집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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