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디언 서머>

말년에 뒤늦게 찾아온 사랑

by 박순영

향미로부터 전화가 온건 지희가 밀린 월급을 떼인채 빵집을 그만둔 그날 저녁이었다.

“너 아직 알바해?”

“오늘 그만뒀어. 왜?”

“우리 아빠 사무실 여직원이 그만둬서...”라는 말에 지희는 퍼뜩 2년전 그 빈소를 떠올린다. 향미엄마가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을 뜨고 그렇게 해서 향미는 지희를 장례식장에 불렀던 것이다. 그때 잠깐 보았던 향미의 아버지. 50쯤돼보이는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향미 친구구나. 와줘서 고맙다”하며 애써 웃어보이던 그.

그때 기억으로는 수입업을 한다고 했던것같다.

“아빠 아직도 그 일 하시니? 그럼 내가 할 일이..”라고 지희가 말끝을 흐리자, 향미의 아버진 주로 출장을 가서 그저 사무실 지키면서 전화받고 팩스 오면 답하고 가끔 청소정도만 해주면 되는 일이라고 한다. 일은 고되지 않을거라면서 그에 비해 보수가 괜찮다는 말에 지희는 하루만 생각해볼게,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는다.

일에 비해 보수가 괜찮다는 조건엔 마음이 끌리지만, 친구 아버지 회사라는게 걸린다. 하지만 당장 밀린 월세부터 해결해야했고 늦어도 다음학기엔 복학을 해야해서 하루가 가기전에 향미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할게.

그렇게 지희는 혁진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 첫출근이라고 지희는 나름 신경쓴 차림으로 사무실을 들어선다. 그러자 영어로 전화를 하던 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그렇게 10여분의 통화를 마친 혁진은 지희에게 와서 뭐좀 마시겠냐고 묻는다.

지희는 됐다고 대답하지만 혁진은 직접 지희의 커피를 타와서 마주 앉는다.

“지희라고 했지?”

“네 양지흽니다”

“지금 휴학중이라고?”

“네..그래서 다음학기엔 복학해야 해서요. 오래 근무는..”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혁진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았어. 일단 6개월로 잡지, 하며 지희가 할 일을 알려준다. 일의 내용은 향미로부터 전화로 들은 거의 그런 내용이었다. 일종의 단순직이었다. 엑셀좀 하나? 혁진이 묻고 지희는 한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취업하면 꼭 필요하다 생각돼서 엑셀을 비롯한 컴퓨터 활용법을 틈틈이 독학으로 해온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혁진은, 그때 와줘서 고맙네,라며 2년전 장례식을 언급한다. 당연히 갔어야죠,라며 지희는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혁진은 곧바로 외근이라며 사무실을 나가고 지희는 혁진의 책상부터 정리한다.

“일은 할만해?” 정수가 궁금한 듯 물어온다. 정수와는 같은 대학동아리였다. 그냥 그렇지 뭐...하자, 향미 아버지라며? 하고 물어온다. 향미도 같은 동아리 활동을 잠깐 했던 터라 셋은 서로를 알고 있다.

그래서 좀....근데 보수가 좋아,라고 하자 야,나도 좀 하자 ,며 정수가 개구지게 웃는다. 넌 공부나 열심히 해.,하자 자긴 공부머리가 아니라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정수와 학과는 달랐지만 지희와 잘 맞는 구석이 있어 휴학 후에도 자주 학교나 근처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곤 하는 사이다.

그렇게 붙어다니는 둘을 보며 향미가 니들 cc하냐? 라고 놀리곤 했다. 그러면 정수는 ,야,나도 보는 눈있어,라며 손사래를 치곤 했고 지희는 cc같은 소리,라며 일축하곤 했다. 하지만 휴학을 하고 학교와 멀어지면서 제일 먼저, 그리고 많이 떠오른게 정수였다. 그 맘을 알아차렸는지 정수는 이따금 지희가 자취하는 부암동 근처로 와서 없는 돈을 털어 술을 사주곤 했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라는 케케묵은 속담까지 들먹이며...


비가몹시 내리던 날, 비행기가 뜨지 못해 혁진이 공항에서 그냥 돌아온 날, 지희는 모니터에 떠있는 엑셀창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화들짝 놀란다.

“뭐하고 있었어?”라며 지희의 모니터를 살펴본다.

“나 없을땐 놀아도 돼”하며 지희의 등을 툭 친다. 지희는 순간 움찔한다.

“아 미안...향미같아서 ” 혁진은 쑥스러워하며 자기자리로 간다.

“커피 드릴까요?”지희가 묻자 “좋지. 부탁” 하고는 혁진은 창밖 하늘을 내다본다. 비가 계속 내리네..한다.

“자네것도 타지”하는 혁진의 말에, 그냥 “너”라고 하세요. 딸 친군데,라고 지희가 대답하자 , 그래도 어떻게,라며 혁진이 조심스러워한다.

그렇게 커피를 나눠 마시던 혁진이 문득 “자네 남자친구, 요즘은 남친이라고 하나? 그런거 있어?”라며 농처럼 물어온다. 그말에 지희는 “남사친은 있어요”라며 정수를 떠올린다. 남사친? 아, 남자 사람 친구? 라고 혁진이 되묻고 지희는 정말 친구요, 하자, 혁진은 나도 여사진 있음 좋겠다...하며 혁진이 씩 웃어보인다.

자세히 보면 꽤 잘 생긴 얼굴이라고 지희는 느낀다. 비록 세월의 옷을 입긴했어도 새치가 드문드문한 머리가 오히려 운치 있고 사람좋아보이는 이목구비가 아직도 충분히 연애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지희는 그런 자기가 엉뚱하다는 생각에 픽 웃는다. 지희가 웃자, 왜? 하는 표정이 되는 혁진.



“울 아빠가 잘 해주지?”라며 마주 앉은 향미가 묻는다. 그럼, 지희가 대답하자, 어디 좋은 아줌마 없니? 라며 지희가 뚱딴지같은 질문을 해온다. 왜? 하자, 울아빠 이제 50이야. 장가가야지,라고 한다.

지희는 그런 향미가 의외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간지 이제 고작 2년인데 향미는 벌써 아버지의 재혼을 생각한다는게 조금 빠르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원하실까?”라고 하자 향미는 더욱더 의외의 대답을 한다. 남자는 생리적으로도 혼자는 못산다는. 그러면서 엄마가 암투병을 꽤 오래 해서 아버진 내내 홀몸처럼 지내왔을거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향미가 지희는 조금은 낯설지만 이해를 못할 사안도 아니었다. 해서, 찾아볼게,하고 답한다.

향미를 만나고 집으로 온날, 지희는 전화 주소록을 뒤적여본다. 혁진에게 어울릴만한 누가 없나, 하는 심정으로...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다. 그때 정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집앞이라며. 해서 둘은 다시 만나 술을 먹고 헤어진다. 정수는 하루만 재워달라고 애원하지만 지희는 등을 떠밀어 택시에 태운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밤바람이 꽤 차다고 느낀다.


혁진이 미뤘던 중국 출장을 간 사이 지희는 자기 나름으로 현재 국내 리빙용품 트렌드를 분석해놓았고 혁진이 귀국 한날, 그걸 건넨다. 그러자 혁진은 몇장 훑는 시늉을 하더니 , 아니 이걸 자네 혼자 다 했나,하며서 기특해한다. 도움이 될까 해서요,라고 지희가 말하자, 당연 되지,하며 대견해한다. 그러면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한다.

둘은 그렇게 사무실을 나와 근처 혁진의 단골식당에서 순댓국을 시킨다. 지희는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었지만 혁진이 한번 먹어봐,하면서 권해서 할수없이 먹게 된 것이다 처음엔 좀 비리다 싶었지만 한두숟갈 떠넣은 다음부턴 그나름 먹을만하고 맛있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콧등에 땀을 송글송글 맺혀가며 혁진이 맛있지?하고 묻는다. 네, 맛있어요..

“청소 매일 할 필요없어. 일주일에 한두번만”하고 혁진이 마지막 수저를 뜨며 말한다. 지희는 출근하면 혁진의 책상부터 정리하고 바닥을 물걸레질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자네, 향미랑 나이가 같은가?”라는 말에 지희는 제가 한 살 어려요. 일곱 살때 학교를 들어가서,라고 답한다. 아,그런가...양친 다 계시고? 혁진이 물어온다. 지희는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젊은 나이에 홀로된 지희의 어머니는 재가를 하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혼자 힘들여 지희를 키우고 지금은 친척 과수원을 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네,하며 혁진이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기...하고 지희가 운을 떼다 말자, 뭐, 말을 꺼냈음 다 해야지.라며 혁진이 물로 입가심을 하며 말한다. 하지만 지희는 향미가 말한 혁진의 재혼이야기를 말하지 못한다. 내가 뭔데,라는 생각에...

한동안 출장이 없던 혁진은 어느날 대구에 내려간다며 시간이 되면 바람이라도 쐴겸 같이 가자고 지희에게 권한다. 내 차로 갈거니까 힘은 별로 안들거야. 새벽일찍 출발해서 밤이면 돌아온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렇게 지희는 혁진이 모는 차에 타서 대구까지 가게된다. 혁진의 운전솜씨는 능숙했다. 그러면서도 지희를 배려해 매우 조심하는 눈치였다. 저도 운전좀 하는데, 하자 됐어,하며 그가 씩 웃는다.

정수가 주는 편안함과는 또다른 아늑함을 이 남자가 준다,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대구에 도착한 둘은 우선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적재해놓은 물류창고를 돌아본다. 사무실에서 간단한 업무만 봐온 지희는 상상외로 회사규모가 크다는걸 알아차리고 적잖이 놀란다. 혁진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업무지시를 내리는걸 보면서 지희는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대구에서 올라올 때 지희는 굳이 괜찮다는 혁진을 설득해 번갈아 운전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지희가 운전대를 잡자 혁진은 피곤했는지 이내 곯아떨어진다. 춥겠다 싶어, 뒷좌석에 비치된 담요를 지희가 덮어주자 혁진이 눈을 뜬다.

“죄송해요 깨워서”지희가 말하자,

“자네가 하도 운전을 잘해서 그만...”이라며 다시 자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시간쯤 달려 둘은 휴게소에 도착하고 간단히 분식으로 저녁을 때운다.

저녁을 먹던 혁진이 뜬금없이 물어온다. 남친은 어떤 녀석이야,하고. 처음엔 누굴 뜻하는지 몰라하던 지희가, 아. 걔, 그냥 친구예요, 하자 혁진은 그래?하고 빤히 지희를 쳐다본다. 그러자 지희는 순간 혁진이 남자로 느껴진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가 향미 아버지라는 현실을 깨닫고 딱히 할말이 없다.


그날밤, 굳이 집앞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혁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지희는 부암동까지 그의 차를탄다. 내려서 금방인가?혁진이 묻고 조금만 걸으면 돼요,라고 지희가 답하자, 같이 걷지,하며 혁진이 따라 내린다. 혼자 충분히 가요,하지만 혁진은 어느방향이지?라고 묻는다.

그렇게 외등도 거의 없는 골목길을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걷는다. 몇학기 남았지?하고 혁진이 물어온다. 3학기라고 지희가 답하자, 그럼 학교 다니면서 자기 일을 계속 봐줄수 있겠냐고 한다. 그렇게 혁진은 지희의 등록금을 대줄 의향이 있는 것이다. 그말에 지희는 , 아뇨 그럼 폐가 돼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다. 그만 가세요. 저는 뛰면 금방, 하는데 혁진이 지희를 끌어안는다. 이게 뭔가, 정신이 없던 지희가 뒤늦게 그에게서 떨어지자, 혁진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러심 안되는거잖아요,라고 지희가 울먹인다.


다음날 지희는 출근을 않는다. 혁진 홀로 내내 사무실을 지키다 저녁 다돼 지희에게 전화를 건다.

그즈음 지희는 정수를 만나 술을 먹고 있다. 정수는 지희가 뭔가 할말이 있다고 생각돼서 계속 묻지만 그녀는 말없이 맥주만 들이킨다.

“너 남자 생겼냐”“정수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묻자, ”50이면 너무 많은가?“라고 지희가 되묻는다.

”너, 유부남 만나냐?“

”그런건 아니구..그냥, 나이차가 넘 나지?“

”너 혹시..“라며 정수가 눈치를 챈다.

”향미한텐 이야기하면 안돼“라고 지희가 당부를 한다.

그러자 ”이거 인디언 서머네“하며 정수가 허허 웃는다.

”그게 뭔데“지희가 묻자 ”말년에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란 뜻이야. 여태 그것두 모르냐?"

그말에 지희는 인디언 서머를 되풀이한다...

”정신차려. 향미 어떻게 보려고 “정수가 500을 추가로 시키면서 말한다.

”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지희가 대답하는데 혁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안해. 아무래도 자네가 불편해하는거 같아. 구인광고를 다시 냈어“라며 혁진이 커피를 비우며 지희에게 말한다. 안그래도 지희는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다. 지희는 아무말도 없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봐“혁진이 마른 세수를 하며 난감해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희는 그를 꼭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인디언 서머래요“라고 지희가 말하자, 혁진은 뭐? 하는 표정이 된다. 그런게 있대요, 지희가 여운을 남기며 식고 있는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 안는다.

”친구가 건축 사무소 하는데 마침 내근할 사람을 찾는데서 자네 추천했어“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지희는 고개를 젓는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하자 혁진은 미리 준비해온 봉투를 내민다. 뭐예요? 자네 월급.

그리고는 한달치에 좀 더 넣었어,라고 그가 덧붙인다. 그러고보니 혁진밑에서 일한게 거의 한달이 다 돼갔다. 고맙습니다, 지희가 인사하자, 자네를 가볍게 봐서 그런거 아냐,라며 혁진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도 당신이 향미 아버지만 아니었음...하는 마음이 지희를 스친다.

그렇게 둘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까페를 나선다. 가끔 전화해도 되나? 혁진이 물어온다. 하지만 지희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안되는걸 물었네,하며 혁진은 저만치 주차된 자기 차로 가다, 바래다줄까?하고 되돌아보면, 이미 지희는 골목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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