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수란은 눈을 뜬다. 시계는 고작 3시를 가리킨다. 좀 일찍 깼네, 하면서 늘 하던대로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밤사이 혁기의 문자가 왔나 확인한다. 자기전 잘자라는 내용의 문자나 이메일을 곧잘 보내는 그라서 이메일도 열어보지만 광고메일밖에 없다. 없네,하고는 전화기를 내려놓다 수란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어제 둘이 헤어진 것을.
제가 해드릴게요, 하고 혁기는 무인기앞에서 버벅대고 있는 수란대신 주문을 해준다. 세트로 하실거예요 아님 단품으로? 하고 혁기가 물어온다. 그냥 햄버거만, 수란이 답하자 그래도 음료는 드셔야 하니까,하면서 혁기는 제로콜라 한잔을 추가로 주문한다. 카드주세요, 하고 그가 손을 내민다.
그렇게 수란은 혁기를 2년전 처음 회사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처음 만난다. 워낙 기계치인 수란인지라 서른이 되도록 남들 다 갖고 있는 운전면허도 없이 살아온 터라 어느날 바뀌어버린 주문시스템에 당황해있던 차에 혁기가 도와준 것이다.
그날 먼저 먹고 가게를 나가던 그는 , 번호 알려줄수 있어요?라며 수란에게 와서 물었고 수란도 거부감없이 자기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혁기가 전화를 걸어오면서 이게 내 번호,하면서 씩 웃는다.
그렇게 둘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회사를 다니며 특별한 일이 없는한 점심을 같이 하고 남들처럼 영화를 보면서 서로를 탐하고 밤이면 혁기의 오피스텔이나 수란의 원룸에서 섹스를 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은 흘렀고 그동안 두어번 헤어진 적이 있다. 한번은 혁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한번은 둘 사이에 찾아든 권태기 때문에. 하지만 한달을 못채우고 둘은 다시 만났고 수란은 이 남자와 결혼이란걸 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근래 와서 혁기가 약속직전에 취소를 하거나 늦게 나오는 일이 잦아지고 계속, 피곤해,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신입 부하 여직원 K의 이야기를 하며 일을 너무 못해서 짜증난다고. 수란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결코 K를 짜증내 하지 않는다는걸 알아차릴수 있었다. 우리, 언제 결혼해? 하고 수란이 묻자, 꼭 해야 돼 결혼? 하고는 말없이 맥주만 들이키던 혁기.
그러더니 어제 낮에 오랜만에 점심을 같이 하자면서 전화를 걸어오고 웬일인지 혁기는 딱 한번 가봤던 그 비싼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걸어뒀다. 오늘 무슨 날인가? 하며 수란이 막 나온 뜨거운 그라탕을 후후불며 먹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혁기는, 우리 헤어지자,고 말한다. 뭐? 하고 수란이 늘어난 치즈가락을 손으로 걷어내며 묻는다. 헤어지자고...그순간 수란은 그 K라는 여직원을 떠올린다. 우리, 결혼할 사이 아니었어? 하자 혁기는 짜증을 내며, 그런 사이란게 따로 어딨어. 연애하다 자연스레 하게 되면 하는거지, 너도 좋은 사람 만나. 하고는 천천히 먹고 나오라며 레스토랑을 먼저 나간다. 그러다 돌아보며, 계산 내가 한다...
그렇게 혁기가 레스토랑을 나간 뒤 수란은 잠시 넋을 놓았다 이내 따라 나갔지만 혁기의 차는 이미 저만치 코너를 돌고 있다.
아, 우리 그렇게 헤어졌지 어제...라며 수란은 그제야 남은 잠을 마저 자려하지만 잠은 도통 오지 않고 두어시간을 계속 뒤척이기만 한다.
오늘도 이탈리아 파트너 회사에선 서툰 영어로 팩스를 보내온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아직도 일터에선 팩스가 빈번히 쓰인다는걸 수란은 이곳으로 이직을 한 다음에야 알았다.
영화수입업이라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어.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하고 오는 팩스 답해주고 그러면 사장이 밖에서 전화를 해서 오늘 할 일을 알려줘,라고 하자 혁기는 그거 유령 회사아냐?라며 웃었다. 늘 가식없이 깨끗한 웃음이라고 수란은 생각했다.
수란이 팩스 답장을 하고나자 여지없이 사장 H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그날 할 일을 지시한다. 그리고 자기는 11시쯤 회사 들어온다고. 그사이 수란은 사장이 지시한 일들을 차근차근 해댄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혁기에게 메일을 보내본다. 그러자 메일은 안전하게 혁기에게 가서 안착한다. 차단하지 않았어. 그리고는 혁기의 SNS를 들어가본다. 그것 역시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전에도 두어번 헤어졌다 다시 만난 전적이 있기에 이번에도 크게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수란은 용기내서 혁기에게 전화를 건다. 나야...하자 혁기는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바쁘거든, 미안,하고 전화를 끊는다. 헤어진게 맞는걸까, 수란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장은 도통 온라인 뱅킹을 믿지 못하겠다며 일주일에 한번꼴로 수란에게 은행 심부름을 시킨다. 그런 그가 올드하다고 느끼면서도 수란은 그렇게라도 잠시 바깥 바람을 쐬는게 싫지는 않다. 은행은 붐볐고 30여분을 기다리다 겨우 송금을 하고 수란은 거리로 나온다. 달리는 차들을 보다 수란은 혁기가 놀려대던게 생각난다. 요즘 운전못하는 여자가 어딨냐,면서 면허만 따면 자기가 차를 사주겠다고. 그녀는 다시 그의 음성이 듣고 싶어진다.하지만 기다리자,라고 굳게 다짐하고 그냥 사무실로 돌아온다.
“앞으로 은행일은 점심시간에 가도록 해”라고 사장은 못마땅한 듯 이야기한다. 그럼 내 점심시간이 없어지는거잖아,라고 수란은 생각하지만 이런게 조직생활이란걸 다년간의 회사생활을 통해 익힌터라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기자리에 앉는다.
직원이래봐야 자기 하나고, 사장은 수란의 나이가 많다고 채용을 꺼렸지만 ,수란이 열심히 할게요,라며 강하게 어필하자 수란을 채용한 것이다. 전 직장에서 구조조정으로 잘린 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수란을 보며 혁기가 ,난 능력있는 여자랑 살고싶어,라며 딴지를 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수란이 일하는 곳에 종종 들러 점심을 사주곤 했다. 다 먹고 나선 늘 그의 차 안에서 달콤한 둘만의 시간을 갖곤 했던 기억이 수란은 순간 문득 떠올라 괴롭다.
그러고 있는데 가끔 드나드는 전직 영화감독이라는 M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순간 사장의 얼굴이 살짝 짜증스러워지는걸 수란은 놓치지 않는다. M은 형, 하며 사장에게로 가다가 수란을 보고, 오늘 이쁘네? 라며 농을 던져온다. 가끔 사장이 해외출장이라도 갈때면 M을 불러 수란과 함께 사무실을 지키게 하곤 했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사무실에 놔둔다는게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M은 예전에 애로 영화 두어편을 만들었다며 곧잘 여배우 품평회를 늘어놓곤 했다. 그러면서 여배우 S의 섹스는 죽여준다며, 한번 그녀를 안고 나면 당최 잊히지가 않느다는 둥....수란은 처음엔 그런 그를 경멸했지만 점점 그런가보다, 하고 무뎌지면서 어느날 혼자 사무실을 지키다 보면 혹시나 안오나 하곤 기다려질때도 있었다.
사장과 M에게 유자차 한잔씩을 갖다주고 수란은 시간을 본다. 좀 있음 퇴근이라는 생각이들자 수란은 늘 하듯 화장을 고친다.이곳으로 이직을 하면서 혁기의 회사까진 지하철로 거의 한시간이 걸렷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수란의 마음은 늘 바빴다. 오늘도 아이라인을 다시 바르고 새도우로 음영을 만드는데 M 이 저만치서 보다가 말한다. 오래도 가네...그말에 수란의 화장하던 두손이 멈칫한다.
M과 단둘이 사무실을 지키던 언젠가 수란은 그에게 혁기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걸 말하는거구나, 하고는 뒤이어, 우리 헤어졌는데,하며 수란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화장을 멈춘다. 그리고는 다시 이메일을 혁기에게 보내본다. 차단 안했어,라고 되니이며 이번엔 SNS를 들어가본다. 혁기는 회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게시글과 사진들을 올리곤 했다. SNS도 그녀에게 여전이 오픈돼있다. 수란은 그에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회사를 나온다.
지하철이 오히려 빨랐을거 같은 택시안에서 수란은 계속 시간을 본다. 야근을 자주 하는 혁기인지라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수란은 기사에게 빨리좀 가달라고 채근한다.그러자 기사는 , 막히는게 안보이냐.며 짜증을 낸다. 안되겠다 싶어 수란은 택시에서 내려 뒤늦게 지하철로 갈아탄다. 러시아워라 지하철은 초만원이었고 모두가 땀에 흠뻑 적어있었다. 그런 복마전같은 지하철에서 내리자 수란의 화장은 다 지워져있고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돼있다.
수란은 안되겠다 싶어 지하철 대기의자에 앉아 빠르게 화장을 고친다.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왠지 혁기가 아직도 사무실에 있을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좀 쿨할수 없어? 수란의 예상대로 야근을 하던 혁기는 수란이 회사 앞이라는 전화를 걸어오자 잠시 뜸을 들였다 30분밖에 시간 못내, 라며 약속장소에 나와싸다. 우리 시간을 좀 가짐 어떨까,라고 수란이 그의 설득에 나사저, 혁기가 한말이다. 좀 쿨할수 없냐고...아, 정말 끝난건가,하고 수란은 어느새 송글송글 맺혀있는 자기 이마의 땀을 냅킨으로 찍어낸다.
나 그냥 한말 아니야..널 봐도 인제, 안고싶다는 생각이 안들어 하며 혁기는 조금은 미안한 듯 수란을 보며 대답한다.
남자들은 여자 가슴을 왜 그렇게 좋아야? 가슴만 보이나 봐..혁기는 언제나 수란의 가슴을 애무하는걸로 스킨십을 시작하곤 했다. 수란은 저도 모르게 블라우스 윗단추 두어개를 푼다. 그러자 혁기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며 ,너 뭐하는거야,라며 타박을 한다. 그 순간 수란은 아무말도 못하고 다시 단추를 채운다. 단정히 하고 다녀,라며 혁기는 시간을 본다. 일어나고 싶어하는 눈치다. 많이 바쁜가보네, 하자 신제품 출시땜에 라며 혁기가 남은 주스를 마저 들이키고 일어난다.
그 순간 수란은 두손에 얼굴을 묻는다. 잘 살아,하며 혁기는 수란의 등을 토닥이고 먼저 까페를 나간다. 수란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엥 그를 따라 뛰어나간다. 까페앞에서 실랑이하는 둘을 보며 행인들은 저마다의 추측들을 해대며 지나간다.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혁기가 지겨워하며 그녀를 떼어녾는다. 사랑해...사랑해 혁기씨.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내가 기다릴게,라며 그녀가 울먹인다. 혁기는 그순간 퉤, 침을 뱉고는 그녀를 버려두고 회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버린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거리에 서있던 그녀는 다시한번 확인을 하기로 한다.
그러자 이번엔 이메일도 전화도 SNS도 다 막혀있다. 까페를 나가 회사를 가는 짧은 동안 혁기는 그녀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 그러고 있는데 배달 라이더가 오토바이를 몰며 막 코너를 돌고 있다. 기회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그 오토바이를 향해 몸을 던진다.
댁 때문에 손해가 얼만줄 알아요? 라고 라이더 대영이 씩씩대며 말한다. 정신이 든 수란이 주위를 둘러보자 흰 커튼들이 칸마다 처쳐있는게 보인다. 병원이구나...
그순간 혁기가 땀에 침을 뱉던 모습이 떠오르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웬만하면 걍 살아요”라며 대영이 그녀에게 머리맡의 휴지 두어장을 뽑아 건넨다. 아, 최후의 구원이라 생각한 죽음마저 그녀를 빗겨갔다는 생각에 수란은 휴지를 꼭 움켜쥐기만 할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자 대영이 대신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다.
오늘은 일단 병원에 있으래요. 지금은 찰과상만 입은거 같지만 그래도 검사는 했으니까 결과는 보고 내일쯤 나가든가, 하고는 자신의 헬멧을 쓰다 대영은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웬만하면 걍 살아요,라고. 그렇게 뒷모습을 보이며 대영이 나가는걸 보다 수란은 자기 손에 쥐어진 휴지를 물끄러미 보다 화가나서 대영의 뒤에 대고 던진다. 휴지는 몇센티 못가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대영은 그순간 뒤를 돌아보고 말한다.
“이따 밤에라도 다시 들를게요. 쉬어요 좀. 자면 좋구.”라고는 응급실을 나간다.
수란은 복받치는 설음을 이기지 못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운다. 그리고는 다시헌번 혁기의 SNS에 들어가보면 여전히 자신을 막아놨다.
그날밤 11시가 다 돼 대영은 약속한대로 응급실로 수란을 다시 찾는다.
“왜 왔어요”라며 수란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이거,하며 대영은 캔 음료 한 개를 수란의 손에 쥐어준다. 손이 차네,라며 그가 말한다. 수란은 살짝 스친 대영의 손이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대영이 덧붙인다. 여자들도 헤매는구나 헤어지고 나면. 하며 ,여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줄 알았다고.
이 남자도 이별을 겪었구나, 수란은 짐작한다. 어쩌면 이별한 지 얼마 안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쥐어준 캔음료를 따서 한모금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