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이 울린건 승희의 전화였다. 경찰이라며 빨리 오라고 했다. 승희는 막 아침 샤워를 끝낸 뒤라 머리가 다 젖어있다. 무슨 일이냐며 아침을 준비하던 경민이 궁금한 얼굴로 물어온다. 사고가 났대요....라는 승희의 말에 경민은 무슨 사고? 하며 불안에 휩싸인다.
동준과 도영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돼서 안치돼있다. 허겁지겁 달려온 승희와 경민은 흰 시트로 머리끝까지 덮여있는 둘을 보고는 넋이 나간다.
확인하실수 있으세요?보기가 좀...하며 담당 경찰관이 승희에게 묻는다. 승희는 동준의 시트를 걷어내다 그 자리에 쓰러진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하고 대신 경민이 동준과 도영의 시신을 확인한다. 둘의 얼굴은 형태도 거의 알아볼수 없을만큼 손상돼있고 살점이 일부 떨어져나갔지만 자세히 보면 틀림없다. 경민은 친구들이 맞다며 확인해준다.
넷은 동준과 승희의 약혼여행을 같이 왔다. 오랜 밀고당기기 끝에 결국 동준이 승희에게 청혼을 했고 둘은 곧바로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승희네서 개혼이니 약혼이라는 절차를 거치자며 고집하였다. 그렇게 약혼이 결정되자 승희의 오피스텔로 동준은 아예 자기 짐을 싸서 처들여오다시피 동거를 시작했다.
이미 2년전부터 경민의 원룸에서 같이 살아온 도영은 우린 언제 결혼해? 하며 부러워했다.
그렇게 시내 5성급 호텔에서 동준과 승희의 화려한 약혼식이 거행되고 하객으로 참석한 경민은 테이블 밑으로 도영의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한다. 친구사이라 해도 동준과 경민은 큰 차이가 나는 터였다. 동준은 의류브랜드 L을 이어받을 재벌 2세였고 경민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래서 일부러 대학도 기술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2년제 대학을 선택해야했다. 그러나 경민과 동준의 우정만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단단했고 이퀄했다.그렇게 고교 동창인 둘은 나름대로의 연애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경민은 승희를 동준은 도영을 택해 결혼을 앞두고 있던 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여자들을 소개시키고 그렇게 승희와 도영도 친구사이가 되었다.
심지어는 신혼여행까지 친구들이 따라오는 경우도 있다면서 동준은 망설이는 경민커플을 설득해 집안 별장이 있는 강릉으로 억지로 가다시피했다. 평일이어서 넷다 퇴근후로 시간을 맞춰 늦게 서울을 출발했고 자정이 다 돼서야 별장에 도착했다. 그러고나서 넷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거의 동시에 하품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각자의 방 두 개에 나뉘어 잠을 자러 갔다. 동준은 승희를 안으며 이젠 내거,라고 좋아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역력한데 승희는 검은 상복을 입은채 시댁식구들 옆에서 문상객을 맞고 있다. 아직 결혼도 안했으니 간단히 조문만 하라는 승희네 부모의 만류도 있었지만 승희는 이미 동준을 남편으로 여기던 터라 막무가내로 우겨 상복을 입은 것이다.
옆방에선 도영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역시 상복을 입은 경민이 몇 안되는 조문객들을 맞고 있다. 피곤한 나머지 가끔 빈소를 나오다 경민과 승희는 곧잘 맞닥뜨렸지만 딱히 서로에게 할말이 없다는 듯 간단히 목례만 건네고 이내 다시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새벽녘, 조문이 뜸해진자 승희는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빈소를 나오다 저만치서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경민을 보게 된다. 승희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로 가서 뭐좀 먹었냐고 묻지만 그말에 대답하는 대신 경민은 불숙 내뱉는다. 그 새벽에 둘은 왜 같이 나갔을까,라고.
경민의 그 말에 승희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움찔한다. 그리고는 자기 역시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돌아선다.
“점심이라도 할래요?” 경민으로부터 한참 엑셀창을 들여다보고 있는 승희에게 전화가 걸려온건 마침 첫눈이 오던 11월 하순이다. 경준과 도영의 장례를 치른지 딱 한달째 되던 날이다. 승희는 딱히 할말이 없다. “바쁘면 다음에”라며 경민이 전화를 끊으려 할때야 “만나요”라며 승희가 대답한다. 둘의 회사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고 그렇게 승희와 경민은 예전 넷이 함께 자주 모이던 그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심플한 실내의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어떻게 지냈어요?”라며 경민이 승희의 핼쓱한 얼굴을 보며 물어온다. “그냥 엉망으로”라며 승희는 말끝을 흐린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오고 둘은 묵묵히 먹기만 한다. 그러다 동준이 고개를 들면 승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이럴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요”라며 위로하다 자기도 울컥해서 더 이상 못먹고 물만 들이킨다. 바깥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블랙박스는 사고원인을 도영의 운전미숙으로 결론냈다. 갓 운전면허를 딴 도영이 차선을 위반해 마주오던 중형 승용차와 정면 충돌한 것이다.
도영이 마침내 면허를 땄다고 좋아한 날, 경민은 다 낡아 굉음을 내는 자기 차에 그녀를 태워 시내를 한바퀴 돈적이 있다. 도영은 무서워하면서도 배운대로 곧잘 운전을 했으나 가끔 차선을 일탈하는 경우가 있어, 어 중앙선 좋아하면 안되는데?라며 경민이 핸들을 조금 틀어주며 농을 날렸다.
그런 도영이 끝내는 차선을 일탈해 사고를 낸 것이다. 충돌한 승용차 운전수도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그렇게 경민과 승희는 눈물로 뒤덤벅된 점심을 같이 하고 딱히 그 어떤 인사도 없이 프렌치 레스토랑을 나와 헤어진다. 다신 서로를 볼일이 없을거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거리는 연말로 접어들어 여기저기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두터운 옷들로 자신을 감싸고 다녔다. 남성 스포츠 매장을 지나던 승희는 쇼윈도우 너머 진열돼있는 B사의 스포츠웨어에 눈이 간다. 동준이 유난히 좋아해서 신품이 나오면 뒤질세라 구매하던 그 브랜드였다. 동준이 봤으면 당장 승희를 끌고 매장으로 들어가 한세트 샀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승희는 울먹거린다.
그때 “잘 지냈어요?”라는 귀에 익은 음성이 돌려온다. 승희가 돌아보자 전보다 더 핼쓱해진 경민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경민씨도 잘 지냈어요?”라며 승희도 묻는다. 그렇게 둘은 한참 또 할말을 찾지 못하다 승희가, 잠깐 나온거라며 다시 회사 들어간다,면서 돌아서려 한다. 그제야 경민은 그녀를 잡으며 , 어디가서 차 한잔 할 시간은 되죠?라고 묻는다.
그렇게 근 한달만에 둘은 다시 마주앉는다. 그러나 둘다 제일 예민한 지점이 마음에 걸려 할말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커피가 식는다. 그러다 승희가 자포자기한 소리로 먼저 입을연다.
그 시간에 두 사람은 왜 함께 나갔을까,라고. 그말을 들은 경민은 마른세수를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도영이 곧잘 바닷가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했다고 덧붙인다. 그러고나서도 자신의 말이 그닥 적절한 변명이 되지 않음을 그는 느낀다. 그럼 우리 전부 같이 갈수 있지 않았냐는 승희의 말에, 그 얘기 그만하죠, 라며 경민은 커피잔을 비우며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승희가 , 잘 지내요 부디, 라고 하자 경민이 말한다. 그쪽도 가게앞에서 멍때리지 말고 정신 붙들고 살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둘은 까페를 나와 각자의 길로 간다. 서로의 간격이 어느정도 벌어졌다 싶을 때 경민이 힐끔 돌아보면 승희는 어느새 뛰고 있다. 저 여자, 또 울고 있을거라고 경민은 생각한다.
그렇게 성탄을 보내고 연말이 다 된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을씨년스럽다. 승희는 문득 자기가 아직 집정리를 안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자기 오피스텔 안에 남아있는 경준의 잔해들을 치우기로 맘 먹는다. 여전히 옷장에 그대로 걸려있는 그의 수트며 트레이닝복, 스포츠웨어들을 정리하고 현관에 놓여있는 골프채는 중고장터에 내놓는다.그리고는 한 여름 스키타기를 좋아하던 그를 생각하다 스키장비 모두 중고장터에 내놓는다. 그러다 그녀는 무릎을 곧추세우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왜 이렇게 안잊힐까...넷이 함께 새벽 드라이브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그녀는 회한에 젖는다. 그러다 문득 경민이 떠오른다. 그도 도영의 유품들을 다 정리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고나고 도영이 껀 죄다 처가에서 와서 불태웠어요”라며 다시 만난 경민이 승희의 눈을 피하며 대답한다. 유리벽 너머 거리는 1월 중순답게 지난밤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다. 그걸 보며 승희가 말한다. 작년 여름 우리 넷이 스키장 갔던 생각나요? 하자 경민은 그제서야 승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말한다.
우리 지금 잠실 갈래요? 하고. 마침 휴일이어서 둘다 시간이 널널하다고 생각한 경민이 툭 던진 이 한마디에 승희는 왠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둘은 지하철로 잠실로 향한다. 그리고는 스케이트를 빌려 서툴게 얼음을 지친다. 승희는 스케이트를 타본 지 정말 오래 됐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경민은 거의 흔들림도 없이 능숙하게 얼음을 지친다. 잘타네, 하고 승희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팔을 잡으며 숨을 고른다. 우리 이거 타고 중국음식 먹을까요? 하고 경민이 난데없는 중화요리를 언급한다.
스케이트장 옆의 중화요리 전문점을 나오자 둘은 또다시 서로에게 할말이 없다...왜 그랬을까? 라며 승희가 저만치 아케이드 패션샵들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그러자 경민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진다. 그리고는 ,우리 이렇게 만나는거 이제 그만 할까요?라고 승희에게 물어온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악수나 하자,며 경민이 자기 손을 내민다. 승희는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경준을 닮았다고 생각돼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는다. 그렇게 둘은 스케이트를 타고 중화요리를 먹고 한낮의 겨울거리로 다시 내몰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둘은 추위마저 느끼지 못할만큼 망자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배신감에 몸을 떤다. 그러다가도, 먼저 잠이 깬 동준과 도영이 아직 자고 있는 나머지 둘은 깨우지 말자고 했을것이고 그렇게 둘은 패딩을 주워입고 새벽 드라이브를 나갔을거라는 상상을 한다. 둘 사이에 이전엔 그 어떤 접점도 없었을거라고. 하지만 그런 낙관적 추측은 순간적으로 끝나고 그 반대되는 추측이 꼬리를 잇는다.
그렇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뒤 승희는 이사를 생각한다. 아무리 동준의 유품을 치웠다 해도 그와 먹고 안고 뒹굴던 공간이 아니든가. 해서 그녀는 가까운 부동산 몇군데에 전화로 오피스텔을 내놓는다. 가능한한 빨리 처분하겠다며.
그렇게 승희가 이사를 한 것은 입춘을 막 지난 한달 뒤다. 승희는 이참에 회사와 가까운곳에 집을 얻겠다고 생각했고 그바람대로 새로 옮긴 오피스텔은 회사까지 도보로 20여분이면 가능한 곳에 위치해있다. 시내 한복판으로 옮기면서 차액이 발생해 예전보다 평수를 대폭 줄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 아늑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렇게 이사를 하고나니 승희는 그제서야 좀 숨을 쉴수 있다는 느낌에 빠진다. 이제야 벗어났다고...그리고는 우연히 전화주소록을 뒤지다 아직 남아있는 동준과 도영의 연락처를 보게 된다. 이걸 어쩌나...그때 마침 문자가 날라온다. “이사했나봐요”라며 경민이 보낸것이었다.
“근처에 갈일이 있어 잠깐 들렀는데 주인이 바뀌었더라고” 경민이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이야기한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번겨울 왜 이렇게 길어요?: 라며 벗어서 개켜놓은 패딩을 다시 주워입는다. “추워요?”라고 승희가 묻자 “궁금해서 가봤어요 어떻게 지내나”라며 경민이 유리벽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경민의 눈가가 조금은 촉촉하다고 승희는 느낀다.
처음 동준이 승희를 소개시켰을 때 조금은 질투했다고 그제야 경민은 털어놓는다. 몰랐다는 표정을 승희가 짓자, 아주 잠깐요,라며 경민은 쑥스러워한다. 그러면 안되는거잖아요 친구 여잔데, 하며 그가 식고 있는 커피를 한모금 홀짝인다.
그럼 안되는건데...라고 승희가 같은 말을 다른 뜻으로 되풀이한다. 또 그 생각이구나. 하던 경민은 발끈 화가 난다. 여태 그러구 살아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라고 하자 승희는 당황해서 그의 눈을 피한다. 미안해요,라고 경민은 사태를 수습하려한다.
“그래요. 우리 슬퍼하는것만 해요”승희가 자기 커피잔을 두손으로 꼭 감싸며 울먹인다. 그런 승희를 물끄러미 보던 경민이 문득 제안해온다. 우리 여행갈래요?
그말에 승희는 놀라면서도 그마음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얼마전에 차를 바꿨다며. 중고긴 하지만 잘 나간다며 경민이 새로 산 중고차 사진을 승희에게 내민다. 승희는 몸을 굽혀 그 사진을 본다. 파란색 지프타입이었다. 운전석이 높아서 운전하기 좋다,며 경민이 웃는다.
승희는 사진을 본 뒤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경민은 승희의 대답을 기다리며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한말, 하고 운을 떼는데, 가요 우리. 여행,하며 승희가 말한다. 가서 바람쐬고 와요. 바다구경도 이번엔 제대로 하고. 그러자 경민은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표정이 된다. 그러더니 승희에게 , 손줘봐요.라고 말한다. 기다리는 그의 손을 보다 승희는 조심스레 자기 손을 그위에 얹는다. 그러자 경민이 힘 주어 그 손을 꼭 쥔다. 날 풀리면 곧바로 갑시다 여행. 하며 그가 모처럼 웃어보인다. 승희는 확답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