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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Sep 03. 2023

소설 <흐린날의 연서>

아무리 포장 이사를 한다 해도 주인이 싸야 할게 만만치가 않다. 여러번의 이사경험으로 강희는 그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은결이 와주기로 했건만 , 분명, '시간 내서 들를게'라고 전화로 언질을 주고도 그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차피 큰짐이야 건드릴 필요가 없다 해도 그 안의 자잘한 것들은 손이 좀 가야 하는데....



그렇게 '주인이 챙겨야 하는 물품'을 정리하고 한숨 돌릴때즘 은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고보니,  한참만에 걸려온 전화다.


"응"

"내가 좀 바빴어. 갑자기  파일럿을  맡아서"

"응"

"너 화났구나"

"바쁘면 할수 없는거지"

"이삿날도 웬만하면 시간을 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은결과 강희 사이에 틈이 생긴건 바로 지훈과 다시 이어지면서부터다. 그 전까지 은결은 세상 둘도 는 친구였고 서로가 필요할땐 돈까지 주고받던 사이였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지훈과 '완전히 끝났다'고 하고 지훈에게 주려고 샀던 스포츠웨어며 몇가지 물품을  은결에게 주게 되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그 사람 거만하고 사람 좋아 보이지 않았어"

"그랬어?"

"니가 좋아한다니까 내가 뭐라고 하질 못한거지..."


그날이후로 은결은 하루에도 몇번씩 메시지며 전화를 걸어와 강희에게 '괜찮냐'는 안부를 물었다. 지독하고 오랜 연애의 끝을 맞고 그걸 감내해야 하는 그녀에 대한 관심과 걱정에서라고 생각하면서 강희는 그런 은결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리고는 곧잘 퇴근 길이면 먹을걸 사들고는 찾아오곤 하였다. 그러면 둘은 마주 앉아 맥주 캔을 따며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고 그걸 또 받아주곤 하였다.


"넌 왜 장가 안 가?"

"니가 여태 이러고 있으니까"

"치..."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같은과 복학생  선균과 광풍같은 연애에 휘말려  결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은결은 한참을 입을 헤 벌린채 망연자실해 했다.


"너 임신이라도 했냐"

"아냐 그런거..."

"근데 뭐 그렇게 서둘러"


은결과는 대학 신입생 무렵 영자 신문  동아리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강희는 불문과, 은결은 법학과였다. 은결의 집안은 대대로 법조계 출신이어서 은결은 어떻게든 판검사가 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법과를 진학한것도 다 부모의 강권이라면 강권에 의한 것이었다.


"난 법복 같은 데 미련 없거든."

"그럼 어떡하냐 너"

"몰라...될대로 되라지..."

하고는 은결은 도서관 강희의 자리옆에 자기 책가방을 놔두고는 가끔은 수업까지 빼먹으면서 농구니 당구에 전념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과장과 친분이 있는 은결의 부친이 학교에 들렀다  빗속에 웃통을 벗어 제끼고 농구에 열중에 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차에 강제로 태우던 광경이 지금도 강희의 뇌리에 생생하다.

그일이 있고 나서 은결은 제법 공부에 집중하는가 싶었지만 결국 입대하기 직전 휴학이 아닌 자퇴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강희는 복학생 선균과 예정대로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지만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이혼하였다. 그의 잦은 외도와 손찌검이 발단이 되었고 그것이 도를 넘자 강희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이혼을 강행한 것이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지금 이혼쯤은 아무일도 아니라고 말들은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무슨 말 하려는 지 알아. 하지만 갈라서지 않으면 내가 숨을 못 쉴거 같은데 어떡해"

그때 은결은 천천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개포동 선균과의 신혼집에서 강희의 짐을 빼던 날도 은결은 묵묵히 강희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렇게 강희는 짧은 결혼생활을 마치고  외국계 회사에 입사했고 은결은 신문방송학과로 전공을 바꿔 재 입학을 했다.



그후 은결은 대학 졸업후   케이블  방송  pd로  입시했고 기상 캐스터와  연애를 했으나 오래 가진 못했다. 그렇게 그녀와 마침표를 찍던날, 은결은 술이 잔뜩 취해 강희에게 전화했고 둘은 강희의  오피스텔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구구절절, 서로의 사연과 내막을 아는 터라 이 관계는 평생 갈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틀어지는 조짐을 보인건 바로 지훈을 만나면서 부터다.

"니가 제대로 된 놈과 연애를 하면 내가 뭐라 안해"

"그렇게 말하지 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지훈은 애딸린 이혼남이었고 출판사를 운영하다 부도가 나서 현재는 단편 소설,  칼럼, 기타 잡문을 쓰며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무명 작가였다.

"애라도 없면..."

이라며 은결은 끌끌 혀를 찼지만 강희는 지훈의  스산하고 어두운 마력에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하듯 끌려들었다. 하지만 지훈은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어서 '이게 연앤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둘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은결은 묵묵히 강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지훈과의 관계는 일종의 도박이면서도 질기디 질긴 끈같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처음 둘이 남도로 여행을 간다는 말을 하자 은결의 양볼에 씰룩씰룩 경련이 이는걸 강희는 분명히 보았다.

"너 잘 번다고 그 거렁뱅이가 지금 곁에 불어있는거 몰라?"


은결은 지훈의 궁색함이 여러가지를 의심하게 만든다고 여러번 어필 했다.

"니가 백수였어도 너랑 사귈거 같아?"



한번은 강희가 홍콩 출장을 가기 전날 지훈과 대판 싸우고 결별을 했다. 그리고는 밤새 울어 퉁퉁 부운 두눈으로 인천공항에 도착을때 저만치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는 지훈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한채  그의 품에 안기던 기억이 있다.

"내가 가진게 없어. 그래서 자격지심에 너한테.." 라던 지훈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그 출장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날  지훈은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준비했을 청혼 반지를 강희에게 내밀었다. 강희는 긴가민가 하면서 그 반지를 쳐다보았고 ,낄래? 라는 은결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날밤 둘은 인근 특급 호텔을 찾았다. 청혼받은 날 싸구려 모텔에는 죽어도 가기 싫다는 강희의 말에 은결은 못이기는 척 그러자고 했다.



차마 그 얘기까지는 은결에게 할수 없었던 강희는 에둘러

"나 그 사람이랑 살아야 할거 같아"라고 하자 은결은 묵묵히 듣다가  "니가 좋으면야"라며 말끝을 흐렸다.

"식은 안올리구?"

"나중에 여건 되면. 혼인신고도 그때 하려고 해"

"잘살아 이번엔"

하고는 은결에게서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결국 은결도 남자였어,라는 생각이  강희의 마음에 꽂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후로 지훈은 빈번하게 강희의 아파트를 드나들었고 누가보면 부부라고 해도 이상할것 없이 자연스레 함께 했다. 가끔은 지훈의 아들 현이도 데려와 셋은 마치 가족같은 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처음엔 데면데면해하던 어린 현이도 언제부턴가 강희에게 먼저 말을 걸고 장난도 치면서 자기 나름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게 눈에 보였다.

물론 강희의 집안에서야 둘의 관계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나중에는 누구든 좋으니 시집만 가다오, 톤으로 바뀌어서 주변의 여건이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  한번 다녀온 딸인 만큼 오히려 조금 처지는 상대가 낫다는 판단을 한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따금 살림을 합치는 일과 혼인신고 말이 나오면 지훈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게 뭐가 중요해""

"내가 원해. 그래도 안돼?"

"그런거 다 허세고 쓸데 없는 짓이야. 그런다구 깨질 사람들이 안 깨지디? 너만 해두..."


그러다가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곤 하였다. 최소한 강희의 이혼 이야기만은 묻어두려는 그나름의 배려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훈의 작품이 출판관정에서 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겨우 출간이 된다 해도 거의 판매가 되지 않자 그는 갈수록 말수가 줄었고 가끔은 포악해지기도 하였다.. 손찌검만 안했지 그의 시니컬한 자조적 비하와 강희에 대한 공격적 태도는 나날이 심해져갔고 그일로 둘은 또다시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참기 힘들어진 강희가 오랜만에 은결을 만나 지훈과의 마찰을 얘기하자, 은결은 "그 결혼 꼭 해야겠니?"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지훈과는 헤어진 지 삼사일을 넘기지 못하고 누가 먼저랄것 없이  연락을 했고 둘은 그렇게 다시 이어지곤 했다. "것도 인연인가 보다"라며 은결은 씁쓸하게 술잔을 비웠다.



하지만 강희가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 여성과를 찾고 임신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을땐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 얘기를 전화로 전해들은 지훈은 1초의 망설임도 없 지우라고 했고 임신을 계기로 혼인신고라도 할 수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강희는 단번에 자신의 존재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밤을 새워 고심한 끝에 아무래도 지훈과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그를 위해 사둔 건강보조식품이며 전자담배, 유명 브랜드 스포츠 웨어 등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지훈에게 이별을 통보한 뒤에. 그리고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비상구를 내려가던 그녀는 발을 헛디뎌 그만 유산을 하고 말았다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은결은 이젠 정말 끝이겠구나 싶은 표정을 짓고는 아무말없이 강희가 내주는 지훈의 물품들을 받아들었다. 지훈에게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강경하게 선을 그었다.



이렇게 될거였어 그와는....

응급실에 누워있는 강희곁에는 지훈 대신 은결이 있었고 은결은 처음으로 강희의 링거 꽂힌  앙상한 손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퇴원과 함께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말을 듣고 강희는 서둘러 전셋집을 알아보았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공실로 나와 있는 집이 있어 바로 계약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참에 지훈의 기억이 묻어있는 이 집을 뜰수 있게 된걸 다행으로 여기려 하였다.

"유산도 출산이나 마찬가지래"라며 지훈은 자주 죽이며 보양식을 사서 퇴근후에 들르곤 하였다.



그러나 이사가 임박할 무렵, 한밤에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려고  곧이어 지훈이 비맞은채로 들어섰다. 그에게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강희는 지난 앙금따위는 일순에 사라져버렸고  한걸음에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그 자식을 또 만난다구?"

이사가는 집에서 아예 지훈과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는 강희의 말에   은결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이후로 발길을 뚝 끊었다.


지방강연이 세건이나 겹치다시피 잡힌 지훈이 새벽, 해도 뜨기전 낡은 suv에 시동을 걸면서 "추워 들어가. 내가 최대한 일정 빨리 소화하고 올게"라고 했지만 그의 일정은 엿가락처럼 계속 늘어지기만 하였다.



20평 방 두칸짜리 소형이라고 해도 이런저런 잔 짐 들이 많아 강희는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그 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이럴때 은결이라도 있다면...하는 마음이 여러번 생겼지만 그가 토라진 지점을 알기에 연락만은 자제했다.


그런데 은결쪽에서 연락이 와서 최대한 시간을 내보겠노라 했고 그런 은결이 강희는 한없이 고마웠다. 그런데, 은결은 오지 않았고 이런저런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지훈 없이 이사를 해야 하기 전날,  오랜만에 은결이 찾아왔다.

"왜, 이사하는거 도와주려구?"

커피를 내리고 있는 강희에게로 다가온 은결이 갑자기 그녀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 안는다.

"왜 이래!."

소스라치게 놀라 저항하는 강희의 목덜미에 은결은 세찬 콧김을 내뿜는다.

"너 무슨 짓이야!. 저리가!" 라고 그녀가  간신히 그를 밀어내면

그는 더 강하게 그녀를 옭죄어왔다.


그러기를 여러번...

결국 강희는 방금 내린 커피를 은결의  가슴팍에 뿌리고 만다.

강희의 완강한 반응에 은결은 잠시 주춤한다...


"왜 그놈은 되고 나는 안되는데?"

은결의 이말에 강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난...너를 남자로 본 적이 없어. 너 알잖아"

"나, 남자야. 내가 여자니?"

"그런 얘기 아닌거 알잖아...난..."

"나는 땡기지 않는다는 말이지?"

"은결아..우리, 친구잖아"

"이놈저놈 거친 그 몸땡이 뭐 그리 잘났다고"

"!..."

 은결은 현관문을 덜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때 현관밖 복도  너머의   세찬비가 강희의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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