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폭설>

아내가 좀 아파요.

by 박순영


어? 민수는 동시에 두여자 다 전시회에 올줄은 꿈에도 생각못한 표정이다. 왔어?진혜에게 한마디하고 또다른 여자에게, 왔네? 하고는 자기도 상황이 우스운지 헛 웃음을 웃어댄다. 사실 진혜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이긴 했다. 도무지 속을 알수 없는 민수에게 또다른 여자가 있을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게 아니어서 지팔자 지가 꼰다는 속담까지 떠오를지경이다. 전시회 초대장을 받았을때부터 진혜는 갈등에 빠졌다. 5개월넘게 온라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고 실제로 몇번 시내에서 만나 밥을 같이 먹었지만 자기에게 손끝 하나 안댄 민수였기에 그걸 두고 이런 저런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루틴한 다른 상대가 있거나, 아니면 재는 거라고.

민수는 진혜가 내려올줄은 정말 몰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제가 방해가 됐네요,하고 진혜가 돌아서려 하자 민수는 가지말라며 그녀를 붙든다.그러자 또다른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진혜는 더 머뭇거린다는게 말이 안되는거 같아 붙잡는 민수를 뿌리치고 터미널을 빠져나와 대기중인 택시 하나에 올라탄다. 기사에게 아무데나 30분만 달려달라고 하자, 기사는, 서울에서 오셨나봐요,하곤 싱긋 웃는다. 아마 말투에서 알아챈것이리라 그녀는 생각한다.


“어? 눈 오네” 라는 기사의 말에 그녀는 창밖을 본다. 예년보다 한참 빨리 첫눈이 내리고 있다 . “서설이네”하고 기사가 룸미러로 그녀를 보며 반응을 살핀다. 진혜는 차창을 반쯤 내려 손을 내민다. 그 손위로 첫눈이 비처럼 내려앉는다. 30분만 돌고 애인한테 가서 화해하세요, 기사가 말한다. 무조건 가달라는 승객이 의외로 많다는걸 진혜는 알게 된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서울차가 끊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밤 묵을곳으로 가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하자 그는 끌끌 혀를 찬다. 그러더니, 그럼 좋은곳으로 모실게요,하고는 외곽으로 빠져 한참을 달린다.


그렇게 진혜는 펜션앞에 도착하게 된다. 어림잡아 객실 대여섯개 정도의 소형 펜션이다. 눈이 내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하고 펜션뒤는 산이 중첩돼있어 그나름의 운치가 있어보인다.

택시 기사가 경적을 짧게 울리자, 안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뛰어 나온다. 진혜보다 서너살 많아 보인다. 남자는 미리 준비해온 캔음료하나를 기사에게 준다. 캔을 받아든 기사가 묻는다. 애엄만 괜찮냐고. 그말에 남자는 애매하게 웃어보인다. 차가 떠나자 펜션앞엔 진혜와 펜션남자 둘만 남아 어색하다. 오늘은 종일 어색하구나...

지금쯤 민수와 그녀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는 깊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빠져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서울에서 오셨나봐요?”펜션 남자가 진혜의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하루만 신세질게요”진혜가 대답하자, 따라오라며 앞장을 선다. 그사이 싸락눈은 함박눈으로 변해있다. 첫눈은 보통 오는지도 모르게 살짝 흩뿌리고 마는데....그가 나직하게 말하며 진혜를 돌아본다. 그러게요, 진혜가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너 누구니?” 진혜가 방에 들어서 짐을 푸는데 대여섯살쯤 돼보이는 계집아이 하나가 열린 문간에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 누구냐,라는 진혜의 질문에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금방 모습을 감춘다. 녀석, 하고는 꺼낸 짐들을 화장대에 늘어놓는데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이민다.

“너 여기 살어?” 진혜가 수줍어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묻는다. 그러자 아이는고개를 끄덕이며 진혜의 목을 두팔로 감아온다. 얘좀봐?라고 하자, 아이는 진혜의 볼에 입을 맞춘다.

“너 아줌마 알어?”라고 묻자, 아이는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부끄러워한다. 펜션남자의 딸이려니, 진혜는 생각한다. 그러고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안 나와? 그말에 아이는 진혜에게서 떨어져 후다닥 방을 뛰어 나간다. 그런 아이를 남자가 때찌! 하며 때리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는 진혜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남자 혼자 키우는 앤가 보다 진혜는 그리 생각한다.

“식사 같이 하세요”라며 남자가 잠시후에 다시 나타나 말한다. 진혜가 생각없다고 하자, 다 포함된거라며 남자도 물러설 기색이 없다. 그래봐야 몇푼 안되는 방값이라 생각한 진혜는 계속 사양하지만,그럼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라고 남자가 말한다. 더 번거로워질거 같아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내려온 식당에 조금전 여자아이가 다리를 달랑거리며 혼자 밥을 먹고 있는게 보인다.

“또 만나네?” 이번엔 진혜가 먼저 아는척을 한다. 그러자 아이가, “아줌마!”라며 그녀를 툭툭친다. “그럼 못써!” 펜션남자가 말리지만 아이는 그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진혜를 자기옆에 끌어다 앉힌다.

“불편해서 어떡해요” 라며 남자가 걱정하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다. “괜찮아요”하며 진혜는 남자가 퍼주는 공깃밥을 받아든다.

“혼자...오셨어요?” 남자가 조심스레 물어온다. 진혜는 뭐라고 할말이 없지만 대답을 안하면 멋대로 상상할거 같아, 일 때문에 내려왔다고 둘러댄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방에 돌아오자 한꺼번에 피로감이 몰려든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진혜는 트윈 베드중 하나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별들이 빼곡한 천장 벽지를 보며, 난 왜 이곳에, 무얼 하러 와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터미널에서의 일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택시에 오르면서 혹시나 민수의 전화가 올까 전원을 꺼놓았던게 뒤늦게 떠오른다. 전화 전원을 켜는데 문자가 잔뜩 와있다. 죄다 민수가 보낸 것이다. 부재전화도 세통이나 된다. 여러통의 문자를 그녀는 나름 요약해본다. 진혜가 올거 같지 않아 대학 후배를 부른거라고.

진혜가 확답을 주지않은건 사실이다. 5개월을 사귀면서 손한번 제대로 잡은적도 없는 남녀가 과연 사귀는 사이라고나 할수 있을까, 해서 그녀는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언제든 깨질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말을 중언부언하고 있는 민수의 문자를 읽다 말고 진혜는 다시 전원을 끄고 눈을 감는다.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그러고 있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안 주무시면...”하면서 남자가 한과와 수정과를 들고 문앞에 서있다.

“안주셔도 되는데”진혜가 쟁반을 받으며 대답한다.

“아직도 눈 와요”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그제야 진혜는 남자와 계집아이가 똑 닮았다는걸 알게 된다.

“아가는요?” 하고 진혜가 묻자, “지 엄마랑 있어요”라고 그가 말한다.

아, 여자가 있었구나, 그제야 진혜는 깨닫고 왠지 못할짓을 하다 들킨것만 같다.

“아내가 좀 아파요”그가 쓸쓸하게 대답한다. 아,진혜에게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괜찮으심 뒷산 올라가보실래요?”그가 말하다, 넘 늦었나? 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안그래도 갑갑한 차에 그녀는 그에게 안내해달라고 청한다.




눈덮인 산은 달빛을 받아 오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조금있음 어두워지니 빨리 올라가야 한다며 남자가 성큼성큼 앞장선다. 그를 뒤따르는 진혜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그렇게 10여분을 올라가니 작은 정자 같은게 눈에 들어온다.

“좀 쉬었다 가죠?” 남자가 정자를 향해 다가간다. 그 정자에서 내려다본 눈덮인 산자락이며 저 아래 마을이 동화속 풍경같다고 진혜는 생각한다. 풍광이 아름다울수록 그녀는 점점 더 서러워진다. 그러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진혜의 모습에 남자는 당황하더니 잠시후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안아준다. 그렇게 진혜는 그에게 기대어 한참을 흐느낀다.

그러다 문득, 아내가 좀 아파요, 했던 그의 말이 떠올라 얼른 그의 어깨에서 떨어져 앉는다.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진혜가 묻자, 저놈 낳고 잘못된게 여태 가네요...라고 그가 말한다.


자세한걸 물을수 없다고 느낀 진혜는 그만 내려가죠, 하고 일어선다. 저만치 어둠이 짙어지는게 왠지 불안하다. 그러자 남자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전나무숲인데, 눈올때가 장관이라고 하며 그것만 보고 내려가자고 한다. 아내 컨디션이 좋을때 함께 와봤다며...그렇게 둘은 정자를 나와 산비탈을 다시 올라간다.진혜가 힘들어하자 그가 한손을 내밀어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산자락을 올라간다.

전나무숲은 남자의 말처럼 황홀하다 못해 두려움까지 안겨준다. 눈지붕을 이룬 나무사이를 새된 바람이 스치고 간다. 그 바람과 어우러진 달빛은 형용하기 어려울만큼 아름답다. 이쁘죠?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이 남자를 만나러 이곳에 왔나보다, 진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내가 오래 아팠으면 남자는 그동안 생리적 욕구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문득 그게 궁금해진다. 그걸 알아차린 듯, 남자가 말한다. 아내를 안은 지 한참 됐다고...

그렇게 둘은 누가 먼저랄것없이 서로에게로 향해 하나가돼서 눈밭을 구른다 . 당신 이름 알려줘,라고 남자가 말한다. 진혜,라고 가쁜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대답한다. 하지만 진혜는 남자의 이름을 묻지않는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

남자의 랜튼에 의지해 간신히 펜션에 도착하자, 아이가 울며 현관에 나와있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당신탓이 아니예요”

조문을 마친 진혜가 빈소를 나오는데 그가, 기형석이 따라나오면서 그녀에게 말한다. 유족 이름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다. 둘이 달빛 아래 전나무숲에서 한몸이 돼서 뒹구는 동안 형석의 아내는 눈을 감았다. 그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형석의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진혜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그럼 안되는거였잖아요”

진혜가 울먹거리자, 그는 말없이 진혜의 손을 잡는다. 다시 오라고. 내년 봄에 꼭 다시 오라고, 그가 애원하듯 말한다. 그러고 있는데 어디선가 형석의 딸 은이 나타나 달려온다.아가야, 나, 나쁜 아줌마야,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자기를 안아달라고 두팔을 벌린다. 진혜는 아이를 들어올려 자기품에 꼭 안아준다. 그러자 아이는 그제서야, 엄마,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말에 형석이 고개를 돌린다. 거 보라고,진혜의 눈빛이 그리 말한다.


눈은 그쳤지만 길은 온통 결빙이 돼 진혜는 몇 번씩이나 미끄러질뻔한다. 그렇게 간신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해보니 마침 출발직전 서울행 한대가 서 있다. 그녀가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데 누군가 자기를 붙든다. 놀란 그녀가 돌아보면, 민수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렇게 가면 자긴 어떡하냐고.

순간, 진혜는 형석과 한몸이 돼서 눈밭을 뒹굴던 자신의 모습이 스쳐간다. 그러자 민수의 치기어린 바람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 설명할게”라며 민수가 5개월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양손을 꼭 쥐며 애원한다.

“너랑 결혼까지 생각했어. 근데 니 속을 알수가 없어서”라고 그가 말한다.

진혜는 G시에서 보낸 이틀을 영원히 잊을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작은 펜션과 전나무숲,달빛, 그리고 폭설. 형석, 그녀의 죽음.


그순간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울가서 연락할게요” 진혜가 손을 빼내며 말한다. 같이 갈까? 민수가 그녀를 놓칠까봐 애 타 한다 “연락해요 꼭” 하자, 그제야 민수는 그녀를 놓아준다. 그렇게 그녀가 버스에 오르자 곧바로 차문이 닫힌다. 빨리 앉으라는 기사의 말에 그녀는 빈자리 아무데나 털썩 앉는다. 그러는데, 밖에서 민수가 창문을 두드리는게 보인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아주 작게, 어쩌면 진혜만 들릴정도로 낮게 들려온다. 사랑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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