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멀리 가는 여자>

새벽기차에 올라 그가있을 남도 그 먼곳으로 향하는 꿈을...

by 박순영


미경이 버스에서 내리자 비는 더욱 거세진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자신의 집까지 10분이상이다. 비를 맞는건 그렇다쳐도 얼마전 폐렴을 앓고난 터라 미경은 그게 더 신경쓰인다. 그렇다고 요즘 세상에 우산을 나눠쓰는 인심이 있을리도 없고 해서 그녀는 죽어라 있는 힘을 다 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때 누군가 자기 팔을 잡는다. 누구?하고 돌아보면 낯선 자기 또래 남자다. 이거 쓰세요,하며 남자는 그녀에게 자기가 받고 있는 우산을 내민다. 됐어요,하고 그녀가 호의를 거절하려하자, 난 금방이예요. 하며 그가 미경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고 자긴 빗속을 맨몸으로 뛰어간다. 누굴까...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회사를 잘린뒤 미경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급을 떼이는 일이 다반사였고 까페일을 할땐 성추행까지 당했다. 이제 서른에 세파를 다 겪은 양 더 이상은 세상을 살아갈 힘도 이유도 없다고 느낀 그녀는구직을 단념했지만 쌀통이 바닥을 뜨러내자 문득 불안해진다. 목구멍에 쌀 들어가는게 제일 무섭다고 했든가. 해서, 어느날 슬리퍼를 끌고 집앞 골목 한귀퉁이에 놓여있는 구인광고지 진열대로 가서 닥치는대로 몇장을 집어들어 학원 두어군데 몇접을 본다. 그래도 학원쪽은 좀 덜하리라는 생각에.


대학시절,학비를 대느라 초등학생 그룹 과외를 한게 다인 나이 서른의 그녀를 그닥 반기는 눈치들이 아니었고 그렇게 한곳은 문전박대를 당하다시피 되돌아오고 다른 한곳은 글쎄요,라는 물음표를 남기고 나중에 연락드릴게요,했다. 비오던날 면접을 본곳이 그곳이다. 미경은 결국은 굶어죽는구나,하고 학원문을 나와 버스를 탔고 그렇게 비를 만난 것이다.


두 번째로 면접을 본 그 학원에서 사흘후 밤 늦게 연락이 온다. 최소한 6개월은 채워주세요,라는 원장의 당부에 미경은 그러마,대답했고 그렇게 그녀는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게 된다. 첫수업이라 나름대로 준비도 열심히 했고 옷도 신경 써서 입는다. 학원수업이 2시부터라 그녀는 대강 점심을 때우고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모퉁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안에서 매대를 정리하는게 보인다. 그런가보다,하고 지나치던 그녀가 멈칫한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를 그녀는 기억해낸다. 버스정류장에서 자기에게 우산을 쥐어준 그다. 자기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뛰어갔던. 아, 우산 돌려줘야지, 뒤늦게 그녀는 그가 준 검은 우산이 떠오른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9시다. 저녁을 걸러 배가 고팠던 그녀는 오는길에 편의점에 들르기로 한다. 그리고는 유리문을 밀다 또한번 머뭇거린다. 그가 날 알아볼까.

그녀가 편의점으로 들어서자 어서오세요,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도시락이...하면서 그녀가 식품매대쪽으로 향하자, 그쪽에, 하던 그가 직접 다가와서 여기요,하고는 도시락이 진열된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네...하고는 그녀는 이것저것 내용물을 비교한 뒤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는 카운터로 가자, 그때 그분이죠? 하고 그가 먼저 그녀를 알아본다. 우산, 고마웠어요. 그녀가 웃어보인다.


미경이 굳이 커피를 사겠다고 해서 둘은 정류장 근처 작은 까페에서 만나기로 한다. 둘다 오후 근무라 오전시간은 한가로웠다. 까페는 이른시간이라 손님이라곤 둘뿐이다.

이거요,하며 미경이 그가 준 우산을 내민다. 안줘도 되는데,라며 그가 받아든다. 우리, 말놓죠. 나이도 비슷한거 같은데,라며 그가 생긋 웃어보인다. 그제서야 미경은 그의 얼굴을 찬찬이 본다. 선한 눈매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웃을 때 치열이 고른게 무엇보다 상큼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윤지훈이라고 그가 자기이름을 말한다.

집이 근천가봐요? 미경이 지훈에게 묻는다. 그러자, 아뇨, 멀어요 . 버스로 한시간. 공기좋은데 언제 한번 오든가, 하며 지훈이 다시한번 고른치열을 내보이며 웃는다.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다, 혹시....T대학 나오지 않았어요? 묻는다. 그러자 지훈이 어?하는 표정을 보인다. T대학 경영학과를 다녔다고. 서로의 학번을 확인한 결과 지훈이 2년 선배다. 호칭을 그럼 선배라고 해야 되나, 미경이 주저하자 졸업은 못했어요,라며 그가 말한다. 그럼 휴학중? 미경이 묻자, 아뇨, 잘렸어요. 제적. 그러며 그가 씁쓸해한다. 무슨일이었을까 싶지만 미경이 관여할 사안이 아닌거같아 , 우산 고마웠어요 하고 그날 둘은 그렇게 그와 헤어진다.

며칠후 미경이 허겁지겁 집을 나서 편의점을 지나치는데, 이제 가나봐요?라는 지훈의 소리가 들려온다. 늦잠자느라, 하며 그녀가 택시를 잡으려고 한다. 교대시간이기도 하고 원래가 택시가 없는 곳이라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고 그걸 보던 지훈이 다가와 타라고 한다. 그말에 미경은 차가 있나? 하고 돌아보지만 그런건 안보이고 대신 오토바이 한 대가 지훈의 옆에 세워져있다. 타요. 얼른. 그렇게 그날 미경은 지훈의 오토바이에 오른다. 헬멧을 씌워주며 그가 말한다. 꼭 잡으라고.

그렇게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미경에게 쉬는 날이 언제냐고 지훈이 묻는다. 화목이 쉬는 날이라고 하자, 그럼 그때 어디 외곽이라도 빠져보자고 그가 말한다. 미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지훈은 다시 오토아비를 몰고 멀어져간다. 윤지훈. 저남자와 연애라는걸 할거 같다는 생각을 잠시하던 미경을 원장이 ,선생님! 하고 2층창문에서 내다보며 부른다. 네! 미경은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난생처음 오토바이를 타본 미경은 왠지 흥분이 된다. 그리고는 일주일후 둘다 시간이 비는 틈을 타 외곽으로 빠진다. 그 오토바이를 타고. 그렇게 도착한 강변은 물 수제비를 뜨면 딱 좋을 잔잔함을 선사한다. 봐요, 하며 아니나 다를까, 지훈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물수제비를 뜬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자주 왔다고...

미경이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그가 말한다. 운동권이었다고. 지금도 운동권이란게 있나 싶은 미경은 더 물어보고 싶지만 그만둔다. 그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그래서 아마 졸업도 못했나보다,싶다.

우리가 모르는게 많아요,라며 지훈이 입을 연다. 여순사건만 해도, 그말에 미경은 왠지 둘 사이에 간극이 느껴진다. 동시에 그가 순수하다는 생각도. 잠시만요,하더니 그가 책 몇권을 그녀에게 문자로 보내준다. 읽어봐요 도움될테니까....제목들부터가 심상찮다. 이게 다 운동권책이예요? 묻자, 운동권책이란건 없다면서 그가 웃는다. 그리고는 가끔 내가 학교신문에 글도 쓰고 했는데...라며 그가 말끝을 흐린다.

학교신문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미경인지라, 예,하고 만다. 지금은 아니죠? 하고 묻자 그가 애매하게 웃는다. 여자는 있는걸까, 그녀는 궁금해진다.



퇴근하고 오던 미경이 편의점에 들어서자, 왔어?라며 그가 편하게 말을 놓아준다. 그래도 선밴데,지난번 강변에서 미경이 말하자, 졸업도 못했는데 뭐,라며 그가 미경에게도 말을 놓으라고 한 기억이 있다.

미경이 , 샐러드 있어..요? 하자, 조금전에 들어왔어,라고 그가 다시 말을 놓는다. 그렇게 샐러드 두 개를 사들고 계산을 하는데, 책 읽었어요?라고 그가 다시 말을 높인다. 우리, 하나로 통일해요 ,미경이 말하자, 그가 씩 웃는다. 책은 읽었구?


미경은 퇴근후 TV를 보는 대신 그가 추천한 책들을 챙겨 읽는다. 여태 자기가 몰라온 역사적 사실,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됐던 사건들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굳이 왜 운동권,이란 용어를 써야할까 싶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그렇게 생각하자 운동권이었다는 지훈이 존경스럽기까지하다. 그러고 있는데 어느날밤 지훈에게서 전화가 온다. 동유럽 영화제가 열리는데 같이 갈수 있냐고. 미경은 주말로 약속을 잡는다.


영화는, 한달간의 인질생활을 한 남자가 어렵게 구출되지만 결국엔 자기가 한달동안 잡혀있던 그 공간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탄압하고 육체적 ,정신적 모멸감을 안겨준 '그들'이 함께 한 공간임에도 자신이 머물렀던 이유에서 그리워지는 그 공간의 의미....미경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눈물을 훔친다. 그걸 본 지훈이 바보,라며 놀린다.


상영관을 나오자, 뭐좀 먹을까?하고 저만치 매점으로 향하던 그가 순간 멈칫한다. 미경이 왜?하고 다가오자, 아니, 후배가...하더니, 유진아! 하면서 매점에서 팝콘을 사고 있는 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내 후배...라고 그가 소개한다. 유진이라는 그녀는 미경보다 한두살 어려보인다. 후배라면 같은 T대학이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F대학출신이라고 했다. 졸업은 못했지만,이라고 그녀도 지훈과 같은 말을 한다. 운동권은 출신대학도 초월해 죄다 선후배로 부르나보다,미경은 생각한다.

그날 미경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혼자 영화관람을 온 유진에게, 넌 시집도 안가고 여태 뭐했어? 하자 요즘은 연극을 한다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러면서 티켓 두장을 내밀며 두분 같이 오세요 제가 썼어요. 라고 한다. "5월의 그녀"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않다. 어? 제기형이 연출했네? 지훈이 티켓에 써있는 연출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유진에게 말한다. 응.. 그 선배...

미경은 더이상 자기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를 대지 못해 적당히 둘러대고 그곳을 나온다. 지훈과 유진은 어떤 사이였을까, 그게 궁금해진다.



둘러대긴 했어도 딱히 불러낼 친구도, 할일도 없어 그녀는 그길로 집으로 온다. 그러다 TV를 켜자 난데없는 전쟁영화가 나온다. 오늘 일진이 이런가 보다,하고 그녀는 채널을 돌린다. 그러다 저만치 읽다 만, 지훈이 추천한 책이 눈에 띈다. 그녀는 TV를 끄고 그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계속 읽어나간다. 여순사건은 그나마 최근들어 그 진상이 밝혀지고 있지만 인접한...거기까지 읽었을 때 미경은 피로감을 느낀다. 물론 마땅히 드러내야 할 진실들이고 그런 일이 가치있다는건 알지만 그럼에도 이 낯섦은 어디서 오는걸까,그녀는 무언가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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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미경은 더 이상 편의점안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한번은 지훈과 눈이 마주치지만 그녀는 서둘러 그의 눈을 피해 가던 길을 간다. 다른 세상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자 그날밤 퇴근 무렵 그에게서 문자가 온다. 따로 내용은 없이 링크만 하나 걸린채로. 뭘까,싶어 미경은 버스안에서 링크를 클릭한다.

그러자 필자가 지훈으로 돼있는 기고문 하나가 뜬다. 쓰여진 단어들 자체가 낯선데다 지훈의 어조가 지나치게 격앙돼있어 공감하기 버겁다는 인상까지 받는다. 그런 그가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갇혀있다는게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는 얼마 안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이 바뀐걸 그녀는 확인한다.


딱히 사랑이라 부를 감정까진 아니었어도 최소한 그렇게 커갈수 있는 맹아는 공유한 사이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게 링크를 받은 뒤 미경은 답장을 하지 않았고 ,노력한다 해서 발전될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자 그의 옆에 유진이라는 여자가 있을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둘이 벌이던 열띤 토론에 자신만 소외돼있던 그날을 잊을수가 없다.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하다. 그가 추천한 책은 여태 같은 페이지에 머물러있다. 언젠가는 읽겠지,하면서도 그녀는 그 책을 책장 한귀퉁이에 꽂는다. 언젠가는....


비가 오는날 어쩌다 우산이라도 없는 날은, 미경은 혹시나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게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더 이상 지훈은 없다. 인정할건 해야 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미련이 가시지 않아 어느날 미경은 지훈에게 용기내서 문자를 보낸다. 그러자, 잠시후 답문이 온다. 웬 포스터를 그가 하나 보내놓고 시간되면 너도 올래?라고 묻고 있다. 포스터 내용은 국가제사에 관한 것이다.

국가제사 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미경은 왠지 답답하다. 모월모처에서 거행된다는 그곳에 그녀는 가야 할지를 몰라한다. 그러는데 그에게서 다시 문자가 날아온다. 니가 꼭 왔음 좋겠어,라고 하지만 그녀는 안다. 설령 그곳에 간다 한들 그녀는 또다시 소외될것임을. 그에 대한 답문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미적거리다 미경은 한밤이 돼서야 결심을 굳히고 답을 작성한다. 가겠노라고. 가서 어떤일이 생기든, 어떤꼴이 되든 그를 보고싶다는 생각에. 그리고는 보내기를 누르려는데 그순간 문자가 온다.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나보네, 잊어버려. 다 쓸데없는 일이니까. 최소한 너한테는...이라고. 그녀는 자신이 작성했던 답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글자씩 천천히 지워나간다.

그날밤, 밤비가 내리기 시작할 즈음 그녀는 새벽기차에 올라 그가 있을 남도 그 먼곳으로 향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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