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행복했던 이별>

1년전 그를 쳐내고도 자기가 내내 그를 기다렸던 사실을.

by 박순영


석우는 이번에 학부강의를 맡았다고 한턱내겠다고 한다. 나은은 스케줄표를 확인한다. 다음주 화요일 저녁이 비었다.

“야, 너 왜 이케 늙었어?” 석우의 첫마디에 나은은 살짝 눈을 흘긴다. “그러는 넌....”

둘은 미대 동문으로 나은은 졸업과 함께 지금의 가구회사 H에 입사하고 석우는 대학원진학을 택해 이제 비로소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대학원진학은 나은이 할것으로 기대했던 동문들은 그녀가 취업을 선택한것에대해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건 나은이 4년을 내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힘들게 공부한걸 알지 못해서다. 게다가 나은의 부친이 10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하고 있고 돈을 댈 사람이 형제중 그녀뿐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우리 어디가서 밥 먹자“

”니가 내는 거지?“

안내나 하라는 말에 나은은 1년전 그집 ”흐름”으로 석우를 안내한다. 인사동 골목 깊숙이있는 화랑을 겸한 한정식집이다. 기섭과 딱 한번 와서 밥을 먹었던.

“야, 여기 분위기 있다?” 라며 석우는 신기해했다.

둘이 자리를 잡고 앉는데 주인 명현이 오더니 대번에 나은을 알아본다.

“ 어? 그때..”하다 마주 앉은 석우를 의식했는지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정식 2인분 주문을 받고 돌아서면서 명현은 한번더 나은을 돌아보고 싱긋 웃는다.

그러더니 궁금했는지, 빤히 석우를 본다.

“약혼자예요” 나은은 불쑥 그렇게 내뱉는다.

아, 하는 표정이 명현의 얼굴을 스친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서 정식 2인분,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가구회사 H 디자인실에 입사해서 처음 한 일은 디자인이 아니라 마케팅팀과의 협업이었다. 시장조사, 전시회관람, 트렌드분석...그때 기섭을 처음 만났고 처음엔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던 그에게 나은은 반감같은걸 느꼈으나 어느날 도면작업이 잘 안돼 야근을 할 때 말한마디없이 밖에서 사온 커피 한잔을 그가 내려놓은 이후 둘은 마주치면 격의없이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화랑겸 식당하는 친구 있는데 거기 가서 점심할래요?”

어느날인가 기섭이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 물어왔다. 화랑을 겸한다는 말에 나은은 귀가 솔깃했다. 한때 순수미술을 하는 전업화가를 꿈꿨던 만큼 그녀의 그림에 대한 미련은 깊었다.

그렇게 둘은 인사동 “흐름”을 찾았고 그때 화랑관장겸 식당사장 명현을 소개받은 것이다.

“누구?” 하고 명현이 눈으로 나은의 존재를 물었을 때 “회사 디자이너”라고 기섭은 소개했다. 알고보니 기섭도 미대 출신이었다. 그러면 디자이너를 지원했을법도 한데 왜 마케팅을? 하고 그녀가 묻자, 나중에 사업좀 할까 하고...라고 그가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한시간 남짓 본게 다인 나은을 사장 명현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 뒤로 기섭과는 사적으로 문자정도를 주고받는 정도가 되었고 이따금 가구 전시회를 같이 가는 사이까지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둘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다른 여자들의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나은은 조금은 진지한 상태로 그를 만났기에 그럴때마다 상처받았고 어느날은 그가 주말에 부산 출장을 간다며 같이 가겠냐고 제안했을 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간해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출장지에서 찍은거라며 바다사진을 여럿 보내 온다. 순간 나은은 적잖이 감동을 받고 그와의 관계를 재고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주 기섭에게 먼저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영화를 보고 살짝 둘의 손이 스치기도 하였다. 집에 바래다준다면서 기섭은 차를 미아동으로 몰기 시작했다. 기섭이 물었다. 혼자 사냐고. 나은이 그렇다고 하자, 부모님은? 하고 물었다. 지금 호구조사해요? 나은이 피식 웃자, 싫음 말고,라며 그가 툴툴댔다.

그렇게 나은의 집앞에 도착했을 때 들어와서 차 한잔 하라고 그녀는 권했지만, 야심해서 안된다,며 그답게 퉁명스럽게 거절하고 그는 차를 돌려 단지를 나갔다. 저정도의 처세라면 다른 여자들이 있다 해도 깊은 사이는 아니리라고 나은은 생각한다.

늦여름이 더위 기승을 부리던날, 나은은 기섭으로부터 문자 한통을 받는다. 비오니 마당빨래를 걷으라는. 자기 아파트앞까지 온 사람이 마당 운운은... 나은은 단순한 농 정도로 받는다. 그래서 비는 무슨, 하고 답을 하려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잘못 보낸 문자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여자들중 다른 누군가에게 가야 할게 잘못왔다는...기분이 상한 나은은 답을 안한다. 그러자, 잠시후 사진 몇장이 날아온다. 이거, 지난번 출장때 찍은거,라며 부산 바닷가 사진들이 도착한다. 지난번 나은에게 보낸것과 같은 사진들이다.

이른바 붙여넣기를 하는구나.


다음날 회사 로비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그녀가 아무 반응없이 지나치려하자, 그가 잡으며 물었다. 나, 퇴사해요. 라고. 그말에 나은은 왜,냐고 묻고싶은걸 억지로 참고 막 열리고 있는 승강기에 오른다.


그게 1년이 됐다. 그와 그렇게 헤어진지. 만약 그정도의 관계를 연애라 말할수 있다면.

“흐름”에 나은이 얼굴을 비쳤으니 어쩜 기섭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나은은 생각한다. 더군다나 동기 석우를 ’약혼자‘로 소개했으니 사장 명현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었다면 확인이라도 하려고 기섭이 연락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곳에 간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붙여넣기 한 사진을 받고 그로부터 마음을 뗀다고 냉정히 굴었지만 나은은 그러고도 내내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약속도 안했는데 가끔은 아파트 발코니에서 아래 주차장을 내려다보며 혹시나 하고 그의 차를 찾기도 하였다. 퇴사한 뒤 그는 뭘 하고 있을까, 그녀는 궁금해진다.


다음주로 잡힌 가구 박람회로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나은은 집까지 자료를 갖고와 들여다 본다. 그러고 있는데 문자 알람이 들려온다. 순간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기섭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의 예감은 들어맞는다. 기섭은 “약혼했다며?”라고 짧게 물었다. 명현으로부터 나은이 “흐름”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가 나름 충격받은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답문을 어떻게 보낼까 망설이는데 그로부터 연이어 문자가 날라온다. 뭘 그렇게 서두르냐고. 그리고는 좀 볼수 있을까,라고 그가 물어온다. 어느새 그는 말을 놓고 있다.



“어? 두사람...”

며칠후 “흐름”에 기섭과 나은이 나란히 들어서자 사장 명현이 뜨악해한다. 그러더니, 앉어앉어, 하며 구석자리로 둘을 인도한다.

명현이 주문을 받고 가자마자 기섭이 물어온다.

“진짜야? 약혼한거?”

그말에 나은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직도 문자에 복사, 붙여넣기,를 하냐고 묻고 싶다. 나은은 대답대신 미소를 지어보인다.

“뭐야, 속을뻔 했잖아” 기섭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한다.

이럴거면 왜 지난 1년동안 문자 한통, 전화 한번 안했을까, 그녀는 그게 궁금하다.

“나 거기 나와서...그건 알겠구나, 지금 사업해”라고 그가 말한다.

“무슨?”

“응. 인테리어사업 조그맣게”

“아...잘돼요 사업은?”

“요즘 다 불경기지 뭐...그냥 그래”라고 그가 쑥스러운지 나은의 눈에서 저쪽 화랑으로 시선을 옮긴다.

“우리 다 먹고 그림좀 둘러볼까?”

그렇게 둘은 정식을 반쯤 남기고 전시회를 둘러본다. 파리에서 갓 귀국한 G의 추상화전이 열리고 있다.

“나, 파리 가고싶은데” 나은이 말하자 “가면 되지 그럼. 언제 시간돼?” 기섭이 애먼곳을 보며 퉁명스레 묻는다.


가구 박람회가 끝나던 날 기섭은 나은을 집에 데려다주며 묻는다. 여기 얼마나 해? 라고. 글쎄, 외곽이라 그닥...나은씨 집인가? 나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대단하네,라고 한다. 그리고는 차 한잔 얻어먹을수 있을까?라고 물어온다.

나은은 그가 그런말을 안했다면 무척 서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얼마전 선물받은 중국차를 그에게 우려준다. 차는 이맛이지, 하더니 “집좀 둘러봐도 돼?”라고 묻는다.


비록 초소형이고 변두리지만 나은의 형편으로는 집을 산다는게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은 아버지의 병원비로 나가는 터라 여력이 없다면 없었다. 그러나 모처럼 하락세에 접어든 부동산흐름을 놓치면 다신 기회가 안올거 같다는 두려움과 아쉬움에 그녀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빌리고 대출까지 받아 집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 작게나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집이 주는 안정감이라는게 이런거구나, 싶어 그녀는 자기 스스로 페인트칠을 해가며 흡족해하던 기억이 난다.

“방 남는거 있음 나한테 세좀 줘.”그가 중국차를 다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남는 방이 없다는걸 눈으로 확인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건? 나은은 그의 말을 곱씹는다.

“사업한다고 집까지 다 잡혀먹고 지금 누나네 얹혀있거든”하며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기섭을 배웅하고 들어오며 나은은 자신이 청혼을 받았나 생각한다. 그러자 그의 붙여넣기식 문자가 떠올라 고개를 내젓는다. 또 속으면 안된다는...그러나, 방금 헤어진 그임에도 그가 몹시도 보고싶다. 자기가 어쩔수 없는 영역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와 결혼이란걸 한다면 감내할 부분이 적지 않음에도 나은은 그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들로 집을 다시 꾸며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를 다시 만나 슬쩍 그런 말을 하자 “맘대루 해. 근데 나은씨 시집가?”라며 그는 모른척 한다. 이젠 그럴 그의 화법에 익숙해진 나은은 빙긋이 웃는다.

“급해서 그래. 한 5000만 안될까?”

나은이 잔업을 처리하고 막 사무실을 나오는데 기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웬만하면 전화를 안하는 그여서 나은이 의아해하는데 그는 다짜고짜 돈이야기를 꺼낸다.

“ 공사대금 받는대로 돌려줄게”라며 그는 애원하다시피 한다.

“내가 그런 돈이...”

그말에 기섭은 한참 뜸을 들이다 말을 잇는다.

“집좀 잡히면 안될까?”

“집?” 하던 나은은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집이라면....

“비싸게 굴지 말고 융통좀 해주지. 내가 안갚는것도 아니고”하는데 나은은 전화를 끊는다.그리고는 그가 그토록 자기집에 관심을 보인것과 시세를 궁금해하던게 떠오른다. 그러고 있는데 동기 석우로부터 전화가 온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석우를 만나 나은은 기섭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다 듣고 난뒤,감정소모일뿐이야,라며 석우가 끊으라고 충고한다. 그와 헤어져 택시를 잡아타고 오는데 나은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자 룸미러로 보고 있던 택시기사가, 아가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다 지나갑니다, 라고 한다.

하지만 나은은 안다. 1년전 그를 쳐내고도 자기가 내내 그를 기다렸던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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