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제야....몰랐어요. 이제야 알았어...”

by 박순영


지안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추가문자를 보낸다.

“잘 있죠?‘

그러자 한시간 후에 그로부터 답이 온다

”나야 늘 그렇지. 잘 지내요“

더 이상 이남자한테 기대할게 없다고 그녀는 느낀다.

지안이 동수를 처음 안건 그녀가 자유기고로 그의 신간서평을 싣게 되면서였다. 우연히 검색중이던 인터넷 서점 신간코너에 그의 소설이 올라와 e-book으로 다운받아 읽고는 리뷰를 모 인터넷신문에 기고하고 그 원고가 채택되면서 인연이 시작된 셈이었다.어떻게 알았는지 그 기사 밑에 동수가 댓글을 달았다.


그후 둘은 간간이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그러다 한달쯤 지났을 때 수원 사는 그가 모처럼 서울에 나온다며 광화문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그렇게 둘은 조금은 어색하게 만났고 동수는 감기기운이 있다며 쌍화차를 시켰다.

동수는 지안의 서평이 담백해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말에 지안은 고맙다고 했고, 그러자 동수는 앞으로 신간이 나오면 지안에게 제일 먼저 알리겠노라 했다. 그렇게 첫만남이 있고 난 뒤에도 둘은 드문드문 이메일이나 가끔 문자를 주고받을뿐 더 이상 관계의 발전은 없었다. 지안이 늘 그의 안부를 묻는걸로 시작했다면 그는 늘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해있었다. 자기는 삶의 부조리함을 제일 참을수 없다고...


지안이 그렇게 자유기고를 한동안 하는 동안 한참 전에 투고한 드라마 원고가 채택되었고 이후로 지안은 눈코뜰새 없이 드라마 작업에 매달려야했다. 그런 와중에도 동수의 메일이나 문자에는 꼬박꼬박 답문을 보내 어떻게든 둘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3년전 무참히 깨진 그연애 이후 다시는 느껴볼수 없을줄 알았던 연애감정을 동수로인해 다시 갖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수는 늘 자기자신에게만 열중해있을뿐 지안에게는 곁을 주지 않는 늘 그 상태로 있었다.

한번은 지안이 녹화중인 드라마 세트장을 잠깐 들른 뒤 나오면서 곧바로 동수에게 전화를 한 적이있다. 둘 사이에 전화를 한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참 벨이 울린후 동수가 전화를 받았고 지안이 자기를 알리자, 동수는 데면데면하게, 무슨 일이냐며 조금은 퉁명스레 물어왔다. 무안해진 지안은 간신히, 시간이 좀 나면 지금좀 보자,라고 했지만 동수는 지금 작업중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수치심에 지안은 알았다고 답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고 이후로 둘은 서로 연락이 없었다. 지안은 그를 잊기로 하고 드라마에만 몰두하려했지만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이 또한번의 실연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3년전 그를 연상시키는 동수의 관계에대한 무책임함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드라마는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시청률이 올라갔고 차기작을 제안해오는 pd들도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다. 그중에 지안에게 일을 미끼로 이성적 호감을 표하는 몇몇도 있었고 지석이 그 중 하나였다. 지석은 웹툰 하나를 각색해보겠냐는 제안을 해왔고 지안은 여태 순문학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싶어 그러겠노라 구두로나마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동수에 대한 마음이 점점 가라앉을 무렵, 그가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인사동에 아는 후배가 전시회를 한다며 같이 가겠냐고. 난데없는 그의 전화에 지안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엔 택시를 잡아타고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에서 두 번째 만난 동수는 전보다 조금 핼쓱해진 모습으로 그녀를 알아보고 머뭇머뭇 다가왔다. 둘은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림을 봤다. 전시회는 서울의 야경을 주제로 한 비구상작들이었고 그렇게 관람을 마친 둘은 근처 한정식집으로 옮겨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아까 바쁜데 오라고 한거 아닌가?” 어느샌가 그는 지안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제야 둘이 동갑이라는걸 지안은 새삼 느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지안의 드라마에 대한 언급을 했다. 나름 볼만하다,고.

지안이 예의상 어떤 작품을 쓰고 있냐고 묻자, 그냥 연애이야기,라며 그가 쑥스러워한다. 신춘문예로 등단한지 꽤 됐고 내는 작품들도 나름대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그에 비해 지명도는 떨어지는 동수가 왠지 지안은 안쓰러웠다.

“이번엔 좀 팔리는걸 써봐요” 라고 하자, “내가 원래 답답한 인간이라”라며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든 다음을 기약하고싶은 마음에 지안은 이번작품 끝나면 짧은 여행을 생각중이라고 운을 떼어본다. 그러나 동수의 반응은, 그럼 좋지, 가 다였다. 함께 갈 마음이 있냐고 물을 여지가 없이 동수는 또다시 벽을 쌓았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도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채 끝나고 지안은 동수에 대해 더 이상의 욕망을 갖다가는 자신이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는 동안 드라마는 후반에 접어들고 지안이 미리 최종회 대본을 넘기고 모처럼 한가한 오후를 보낼때였다. 잠깐 조는가 싶은데 문자 알람이 울린다. 누굴까? 하고 확인한 그녀는 사진이 첨부된 동수의 문자를 받는다.

동수는 강연차 H시에 잠깐 왔다며 바닷길이 열린다는 인근 해변 사진을 여러장 찍어보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안은 혼란에 빠진다. 한참 연락이 없다가 난데없이 이런다는건. 한참을 주저하다, “나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라고 답문을 보내자 역시 한참 걸려 그의 문자가 온다. “수영하고싶다” . 지금이라도 내려오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갔을텐데, 라며 지안은 아쉬워하면서도 어차피 평행을 달릴 인연이라면 이쯤에서 매듭을 짓는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드라마는 괜찮은 성적을 내고 종영을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pd지석이 웹툰각색 이야기를 꺼내와 지안은 그와 접촉하는 시간이 점점 잦아진다. 일 이야기를 핑계로 지석은 자주 지안을 불러냈고 어느날 술이 좀 오른 그는 지안이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딱 3개월 살고 아내와 헤어졌다고. 지안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난감했지만, 그럴수도 있죠, 라고 얼버무렸다. 담담해하는 지안의 반응에 지석은 안도하는 눈치였고 그는 이번작품이 잘되면 콤비합시다, 하며 난데없이 악수를 청해온다. 지안은 밑도 끝도없는 그의 내민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지석은 지안의 삶속으로 들어왔다.

지석과 헤어져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지안은 동수의 생각을 했다. 동수는 왜 늘 난데없는 행동을 하는걸까?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가버리지도 않는 그가 조금은 피곤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집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보자 동수의 전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그녀는 마음을 바꿔 그냥 벨이 울리게 놔둔다. 벨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이 닫힐때까지 계속 울리다 끊긴다.

그날밤 지안은 지석이 보라고 한 웹툰을 몰아보기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 와중에 문득문득 동수가 떠올랐고 왜 전화를 했을까, 그게 궁금했지만 그럴때마다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혼란만 주는 관계일뿐이라고. 그렇게 동틀 무렵에야 지안은 웹툰을 최종회까지 다 보게 된다. 판타지성 미스터리 멜러였고 판타지라는 장르가 자신에겐 좀 생소하지만 어쨌든 방송일로 평생 먹고 살 바엔 이참에 자신의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생각해 판타지관련 도서며 자료들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는데 새벽의 정적을 깨며 전화벨이 울린다. 설마설마 했던 동수의 전화였다. 서너번 울린다음 지안은 전화를 받는다.

“방금 떠오른 생각인데 들어볼래요?” 그는 다시 말을 높이고 있다. 뭔가 이 남자...

“뭔데요?”

“두연인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는데 가기 전날 헤어져서 여자 혼자 여행을 가게 된다는”

그순간 지안은 프랑스 영화 K가 떠오른다.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웃어요? 재미없어?” 그가 다시 말을 내리고, 원래가 이렇게 두서없는 남잔가보다, 지안은 생각한다. 지안은 프랑스 영화 K를 알려주고 한번 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뭐야, 벌써 그런 이야기가 있었단 말이야?”하고 그가 실망하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알았다,며 그는 마무리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이 남자와는 정말 안되겠구나, 지안은 다시한번 확인한다.



그렇게 웹툰을 각색한 그녀의 차기작 기획안은 무사히 윗선을 통과했고 남녀 주인공 캐스팅도 완료되고 4회분 대본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지안은 또다시 원고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지난작품이 끝나자마자 지석이 이번작품을 들이미는 바람에 계획했던 짧은 여행도 무산됐고 충혈된 눈으로 매일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는 자신이 조금은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작품 고료만 다 나오면, 월세에서 전세로 갈아탈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돈벌이에 열중한다는것도 그닥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 작품 끝나면 결혼합시다”

지석이 어느날 불쑥 결혼이야길 꺼내온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접근한걸 모르지 않던 터였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청혼을 하는 바에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안은 아직도 애매한 동수와의 관계가 은근히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하고 그에 앞선 3년전 실연애 대한 우울감도 떨쳐내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딱 3개월 결혼생활이 다라는 이 남자, 나쁘지 않다. 서로 직업적으로도 연결되고 충분히 윈윈할수 있는 관계였고 무엇보다 자신도 지석이 싫지 않아, 생각해보겠노라, 답을 준다.

그리고는 동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와 완전히 끊어진다 해도 왠지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사이엔 조금의 기류만 흘러도 그 흔적에 대한 마무리와 책임이 필요하다고 느낀탓일까?

그리고는 동수에게 오랜만에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머지 않아 결혼을 할거 같다고..그렇게 메일을 전송하고나자 뭔지 모를 헛헛함 같은것이 밀려든다. 하지만 언제가 됐든 종지부를 찍어야 할 관계가 아니던가,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이틀 뒤에 동수로부터 답메일이 온다. 축하한다, 잘 살라고.

이거였어. 이 남자와는 여기까지였어, 하면서도 지안은 혹시나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추가문자를 보낸다.

“잘 있죠?"

그러자 한시간 후에 그로부터 답이 온다

”나야 늘 그렇지. 잘 지내요“



드라마 첫회 리딩이 모두 끝났을 때 지석은 배우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안에게 정식으로 청혼한다. 그렇게 둘의 결혼은 공식화되고 그날밤 지석은 그녀를 태우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한다.오피스텔에 들어선 지안이 낯설어하며 머뭇거리자 지석은 우선 그녀를 따스히 포옹한다. 안심하라고. 그리고 고맙다고.

그렇게 둘의 약혼일이 보도를 타게 되고 여기저기서 축하의 메시지가 지안에게로 날아든다. 동수와는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것이 청춘의 마지막 추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매하고 이기적이지만 분명 연애감정이었던 그에대한 기억...


그리고는 약혼식 당일 신부화정을 한뒤 지안은 도심 G 호텔로 향한다. 주말이라 그녀를 태운 리무진은 오다가다를 반복한다. 먼저 호텔에 도착한 지석은 불안한지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가고 있다고 그때마다 지안은 그를 안심시킨다.

지석은 첫 아내로부터 일방적 이혼통보를 받은것에 상당한 상처를 받은 듯 싶다. 지안도 어느날 문득 자신에게 결별을 통보할수 있다고 불안해하는거 같았다.

그리고 리무진이 G호텔에 도착해 도우미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지안이 뒤따라 내리는데, 카메라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연예인도 아닌 자신의 결혼도 아닌 약혼식에 엔 기자들이 몰려들었나, 싶어 그녀는 황급히 도우미를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앞에 멈췄을 때 누군가 자신의 한쪽팔을 붙잡는다. 그녀가 돌아보자, 전혀 예상못한 동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서 있다.

“동수씨...여긴 왜”

“이제야....몰랐어요. 이제야 알았어...”

라는 그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지안은 뭐라 할말을 잃고 엘리베이터문만 바라본다. 그러다 기계가 마침내 3층까지 내려왔을 때, 그녀는 황급하게 동수에게 말한다.

“그걸 이제야?..”

그러자 동수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입구 유리 회전문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예복 차림의 지석이 내려 지안을 찾는다. 도우미로부터 대충의 설명을 들은 지석이 황망해하는 사이 호텔밖 동수의 낡은 승용차에 지안이 태워진다. 그런 둘의 모습은 기자들의 앵글에 매순간 잡히고 동수의 낡은차는 요란한 시동소릴 내며 기자들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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