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들의 계약>

나이 마흔에 여자 혼자 살거면 어차피 남자 도움이 필요하단걸...

by 박순영

선우는 마치 자기 이사라도 되는 양 새벽부터 와서 초인종을 누른다. 민선은 이삿짐 인부가 벌써 왔나 싶어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문을 열어준다.


"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차로 실을건 먼저 좀 실으려고"

하면서 그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차로 운반할 걸 찾아 두리번거린다.



선우, 대학 신입생때 교내 미팅으로 만났으니 거의 20년이 다 다돼가는 인연이다. 둘다 첫미팅이었고 남자 여자가 어떻게 가까워지는지를 모르던 터라 둘은 그저 커피만 홀짝이다 나중에 봐,하고는 손흔들며 헤어졌다. 이후 민선은 선우를 학교 농구코트에서 자주 목격했다. 어떤때는 수업까지 빼먹고 농구에 열중하는 선우를 보며 민선은 혀를 끌끌 차기도 했지만 둘은 그렇게 연인은 아니어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민선은 영문과, 선우는 무역학과였다. 보아하니 선우는 공부보다는 클럽 활동을 즐기러 대학에 들어온것마냥 클럽 여기저기 가입해있었다.


"야 너 공부좀 해라" 민선이 나무라기도 하면 그저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

역삼각형의 뾰족하고 조그만 얼굴, 얼굴의 반 정도 되는 검은 뿔테 안경....

정말 '없어보이는' 그런 모습에 민선은 선우도 자기와 비슷한 환경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모교등학교 교장 선생 아들이었다.


"너귀족이구나" 하자 "건 울 아빠고 난 프롤레타리아"하며 역시 개구지게 웃던 그였다.

선우는 2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고 민선은 아르바이트를 여럿 하면서도 제 학기에 졸업, 4학년 후반에 이미 웹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전공과 달라도 민선은 업무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뒤늦게 복학한 선우는 아예 민선의 회사 앞에 진을 치듯 저녁 퇴근무렵이면 찾아와서 저녁사라, 술사라, 귀찮게 굴었지만 민선은 그런 선우가 은근 싫지만은 않았다.



남자 나이 저만하면 이성과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계산하느라 저러기 쉽지 않을텐데 선우는 늘 한결같았다. 그러던 선우가 회사앞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웬일이지 얘가? 웬 레스토랑? 하고는 민선은 서둘로 일을 마치고 회사를 나와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러자 선우는 기다렸다는듯이 준비해둔 반지케이스를 내민다.

"나한테 청혼하는거니?"

"미쳤냐? 괜찮나 보라고"

그제서야 선우가 얼마전 sns로 누군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게 떠올라 민선은 무안하고 민망했다.

"직접 주지 그래" 하자 "혹시 몰라서 여친이 맘에 안들어하면 바꾸러 간다고 했어"라며 '그녀'에게 줄 반지를 내보인다. 민선은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 그만큼 내가 격의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게 그날 선우는 그 반지를 '그녀'에게 건넸고 프러포즈는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그날밤 민선에게 보내왔다. 그걸 받는 순간 민선은 왠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선우가 이제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다는게 믿기지 않았고 조금은 약속위반을 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둘은 그저 교내 첫미팅에서 마났을뿐 그 어떤 약속이나 미래를 기약한 사이가 아니므로 서로에게서 완전히 자유롭다면 자유로운 관계니 선우가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해서 조금도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선우는 그녀와 결혼해 무역회사에 다니며 두 아이를 낳고 잘 살아왔다. 민선은 첫결혼에 실패하고 회사 선배가 마련한 소개팅자리에서 동훈을 만나게 됐다.

저쪽도 돌싱이야. 애는 애들 엄마가 키우고...라는 선배의 말에 민선은 이미 자기가 '노멀라인'에서 한발짝 처진걸 느꼈고 인정해야 함을 알았다.


동훈은 대기업 하청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의 오너였다. 말이 오너지 그냥 구멍가게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쪽은 왜 이혼했어요?"

동훈이 첫 만남때 그렇게 물었다. 자기는 정말 성격차이였다고 하면서.

하지만 민선은 차마 남편이 양성애자였다는걸 말할수 없어 주저주저했다. 그말에 대답을 못하자 동훈은 쑥스러운듯 헛기침을 해댔다.

그리고는 둘이 첫밤을 보낸 두달 뒤쯤 민선은 그의 품에 안겨 그 사실을 고백했다. 남편에게 동성애인이 있었노라...

그말에 동훈은 화들짝 놀라 정말?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뉴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지금 자기가 안고 있는 여자로부터 들으니 신기하고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동훈은 회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서너번씩 꼭꼭 메시지를 보내와 어쩌다 메시지가 늦거나 없는 날은 민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나 실수를 하곤 했다 그렇게 민선은 동훈에게 길들여지고있었다.



"나, 다른 일좀 해보고 싶어"라며 동훈이 전업이야기를 한건 둘이 만난 지 반년쯤 지났을때였다.

"지금 사업 잘 된다며?"

"지루해....좀 재밌는거...연예 기획사나 그런거..."

안그래도 동훈의 대학 동창중에 기획사를 하는 친구 이야기를 민선은 자주 듣곤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그쪽일을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것이다.

"그럼 지금 사업 처분해서 하면 되겠네"

"그게 ...좀 모잘라. 너 돈좀 있니?"

결국은 돈 이야기를 하려고 동훈은 그리도 뜸을 들인것이리라. 민선은 거리낌없이 돈 이야기를 꺼내는 그가 야속했고 이제 겨우 반년 사귄 사이에 그건 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해서, 노,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없으면 할수없지, 라며 그 얘기를 접었다.



이후로 동훈은 돈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어필했다. 하청 주는 대기업의 갑질 이야기며 반도체 일은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쉼없이 메시지로 보내왔다. 이건 에둘러 돈을 요구하는이야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민선은 관계를 정리해야겠다 마음먹고 어느날 그의 오피스텔 근처 까페로 그를 불러냈다.

"야, 올라오면 될걸 까페는 무슨"하며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동훈은 그녀앞에 마주 앉는다. 둘은 살구쥬스를 나눠 마시며 자못 심각해진다.

"내가 돈 얘기 안하면 되는거니 그럼?"

헤어지자는 민선의 말에 동훈이 대뜸 그렇게 되받아친다.

민선은 순간 할말이 없어진다.

"우리 사이가 온통 돈 뿐이었어?"

"그런건 아니구..."하는데 바보처럼 민선의 두눈에 눈물이 그렁하다.

"바보..그럴거면서" 하며 동훈이 테이블 너머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익숙한 손. 자기를 쓰다듬고 안고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그 손을 느끼니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증발해버리고 얼른 내 앞 이남자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이후에 동훈은 한동안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자기 일에 대해 투덜대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민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민선은 어차피 결혼할 상대라면 한 5000 대출을 받아볼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잔뜩 오른 이자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동훈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걸 알게 되었다.


"미안, 도움을 준다고 해서 몇번 만나다..."

동훈은 마른 세수를 하며 마지못해 그녀 이야기를 한다.

동훈이 샤워를 할때 그의 휴대폰이 울려 민선이 대신 받아주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게 발단이었다.

"그럼 돈만 받음 되지.."

"그게...미안해..정리할게"라며 동훈은 민선을 다독거렸고 실제로 그녀와 정리하려고 노력도 하는것 같았지만 결국 돈앞에 굴복하는 사태로 나아갔고 급기야는 민선에게 결별을 통보해왔다.

"돈 5000때문에 날 버리는거야?"

민선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그를 나무랐지만 그는 미안해, 그말만 남기고 서둘러 까페를 나갔다.




"야, 그런놈 잘 떨어져나갔다"

일의 자초지종을 아는 선우가 동훈과 민선이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런놈 결혼까지 가봐야 바람피우고 돈 날리고 그러다 또 깨져. 너 두번 이혼하고싶어? 그말에 민선은 얼굴을 감싸고 그저 흐느낄뿐이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30여분 늦게 이삿짐 인부들이 와서 서둘러 짐들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선우는 자기 이사라도 되는양 인부들에게 조심조심 다루라며 짐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고마운 친구...

민선은 지난 20년의 우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세상이 아무리 악의와 악인들로 가득하다 해도 내편이 하나 둘쯤은 있다더니 그중 하나가 선우라는 생각을 한다.



이삿짐 포장이 끝나자 인부들은 점심을 먹고 오겠다며 은근 추가 요금을 요구한다. 이미 계약시에 중식이 포함돼있던 터라 민선이 머뭇거리자 "이걸로 들고 오세요"하며 선우가 5만원짜리 지폐 두장을 선뜻 그들에게 건넨다. "너무 많아"라고 민선이 속삭이자 "이정도는 주는거야"라며 선우가 일갈한다.



그렇게 민선은 선우의 차에 올랐고 그 뒤를 민선의 이삿짐을 실은 이사트럭이 뒤따라온다. 이제 15분만 가면 새집이 자길 기다린다는 생각에 민선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중도금까지 치르고 나자 집주인은 "필요하심 공사하셔도 돼요"라며 도어락 비번을 알려주어 민선은 잔금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집을 수리할 수 있었다. 제일 싼걸로 하긴 했어도 올 화이트에 무엇보다 묵은때가 찌들어있던 주방과 욕실이 환하게 밝아진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동훈과의 얼룩진 애정사도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그렇게 대강의 이사를 마무리하고 인부들이 돌아 간 뒤 민선과 선우는 자장면을 시켜 함께 먹는다. 야, 역시 자장면은 이사날 먹는게 최고!라며 선우는 콧물까지 흘려가며 이야기한다. 대학신입생때 얼뜨기같던 그 모습 그대로다...아직도 선우는 자기 얼굴 반만한 뿔테 안경을 끼고 있다. 여치정도 될까? 아무튼 벌레를 연상시키는 조금은 웃기게 생긴 그의 얼굴이 되레 신뢰감을 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사도 하고....너, 이제 부자다?"

그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민선은 뭐라고? 하고 되묻는다. 외곽으로 나오다보니 조금의 차액이 발생하지 않았냐고 그가 설명한다..아 그거...적금 들려고. 한 3년있다 넓혀가려고. 민선이 그리 대꾸하자, 선우가 주저주저 힘들게 말을 꺼낸다..

"나좀 융통해주면 안될까? 한 3000만"

"뭐?"

민선은 깜짝 놀란다. 20여년동안 돈 얘기는 한번도 꺼내지 않은 선우여서 그녀는 더욱 놀랍고 믿기지가 않는다

"애엄마가 애들 유학보내자고..월급쟁이가 그럴 돈이 어딨냐."



동훈이 돈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했을때 누구보다 펄쩍 뛰며 그런 놈은 차버려야 한다고 한게 바로 선우였다. 그런 선우가 이젠 동훈의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다...아이들 유학비용을 민선에게 요구하면서.


"한 5000이면 더 좋구" 라고 그가 슬쩍 액수를 늘린다.

"그럼 한달에 내가 줄 이자가..."

하는데 민선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듯 손사래를 치며 "나 피곤해. 짐정리도 해야하고" 하며 가라는 손짓을 한다.

"야 섭하다"

"난 ...난 안그래? 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이자 주면 되잖아."

"그래서 나 도와준거니 이사며..."

"그래, 나 너 힘들때 죄다 도와줬잖아. 너 그 거지같은 첫남편일로 고생할때도 그렇고..."

"야, 강선우!"

" 쪼잔하게 그러지 마. 다 돕고 사는거지. 내가 이자 많이 주면 되잖아. 3년만, 아니 2년만 빌려줘"

선우는 완강했다. 끝내 그돈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일단 오늘은 가라고 떠밀듯 선우를 내보내고 민선은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는다. 그리고는 둘이 먹다 만 신문지위에 널브러진 자장면을 쳐다본다. 유난히 단무지를 좋아하는 선우건만 오늘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만큼 그도 긴장했단 이야기리라...


그날밤을 하얗게 새우고 민선은 다음날 9시가 조금 넘어 근처 은행으로 향한다. 할수없다. 아무리 잘난척 용을 쓴다 해도 여자 혼자 나이 마흔이 다 돼 살아가려면 어차피 남자 손이, 남자 도움이 필요하단 결론에 이른 그녀는 재혼하는대로 선우를 끊어내기로 마음먹고 출납계원에게 5000 출금해주세요, 아니,3000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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