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접 Mar 29. 2022

20년째 일기를 원고지에 씁니다.

난 30년째 일기를 쓴다. 그것도 매일매일. 사람들은 이런 나를 정말 대단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일기를 쓰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공부는 못 해도 좋으니 딱 두 가지 독서와 일기는 죽을 때까지 해라"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서 난 쾌재를 불렀다. 공부를 포기하라는 말이 나에게는 해방이라는 뜻이라 그랬다. 그래서 난 즐기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엄마 아빠는 방목으로 공부습관을 하게 하셨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월말 평가를 치렀었다. 그래서 평균 90점이 넘으면 상장을 줬었는데 내가 상장을 받아가면 엄마는 정말 쿨하게 "잘했다" 딱 여기까지. 웃지 못할 일도 많다.



가장 흔한 일은 종이 받침대, 가난해서 라면을 많이 끓여 먹었던 우리 집은 라면을 끓여 오면 갑자기 받침대가 없으면 엄마는 그날 상장을 받아오면 급히 "상장 상장" 하면서 난 그렇게 받침대로 쓰였다. 남들은 "정말?"이라고 묻는데 사실이다. 남들은 상장을 받아가면 뭐도 해주고 뭐도 먹고 한다는데 우리 집은 절대 없다. 그래서 늘 난 "받은 거 없는데" 하면 친구들은 "야 좀 그렇다" 그런 냉담한 반응에도 난 쿨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상장이 아니었다. 일기였다.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거였는데 엄마의 숙제가 있었다. 일기를 쓰는 건 좋은데 형식이 달라야 했다. 오늘은 시를 써서 일기를 쓰고 내일은 그림일기 그다음은 소설처럼 일기를 쓰고, 형식이 달라야 했다. 난 그게 힘들어서 "엄마 그냥 솔직하게 쓰는데 왜 형식이 달라야 해?"라고 물으면 엄마는 " 음.. 생각이 다양해야 하니까"라는 말씀으로 내 입을 막으셨다.


그런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에는 엄마의 훈훈한 댓글이 있었다. 첨언에는 사랑하는 우리 딸 이런.. 하고 시작하는 아기자기한 글들이 있어서 난 그 글을 보는 재미로 살았다. 남들은 그럼 사생활 유출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난 일기를 통해서 엄마와 대화를 더 깊게 할 수 있었고 엄마는 딸이라는 존재를 더 이해하고 나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그 상황을 일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맘 따뜻한 엄마는 때로는 당신도 나를 시로 표현해 주셨고 그런 표현들을 보면서 엄마가 왜 오후가 되면 독서를 하시는지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밥하기 전에는 독서를 하시는 엄마였다. 그리고 가계부에는 콩나물 값과 두부값도 적혀있지만 당신의 하루 소회를 담은 글이 빼곡히 적혀 있어서 작품이었다.


엄마는 그런 글들이 엄마를 버티게 한다고 하셨다. 훗날 고등학교 가서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어렸을 때 엄마가 써준 글들을 다시 봤을 때는 눈물이 났다. 나의 철없음으로 얼마나 엄마가 마음이 아프셨을까 싶어서 , 혹은 엄마가 상처를 받으셨을까 싶어서, 하지만 "엄마는 엄마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하시며 뚝심 있게 자식들을 키워내셨다. 엄마도 지금까지 일기를 쓰시고 계신다.



그렇게 나도 결국은 말도 안 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30년이 다 되었다. 내 가방은 늘 일기장이 있다. 난 일기를 원고지에 쓴다. 원고지에 쓰게 된 건 대학교 때부터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다이어리에 썼다. 그런데 내 맞춤법을 고치고 글다운 글을 써보겠다고 나름 비장함에 원고지를 두껍게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글을 쓰는 줄 알 거다. 아니다. 난 그냥 일기를 쓰는 거다.



일기를 쓰면서 좋은 점은 , 인간이기에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으니 추억을 저장하는 것도 있지만 원고지에 갇혀있는 글자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글 한 자 한 자를 더 사랑하고 한 자를 쓸 때마다 더 적확한 지를 따지게 되어서 난 신중함을 기하게 되었다.



왜 작가들이 글자 한 자에도 1년이라는 시간을 들이는지 대충 가늠이 된다고 할까?

원고지에 글자가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나올 수 없다. 마치 내가 인형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기분이라면 유사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30년 일기에 내 결론은 끊임없는 인내와 생각은 더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난 만년필을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필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두 가지 번갈아 가며 쓰고 있다. 만년필과 연필. 기분에 따라 쓰기는 하지만 날카로운 글을 쓸 때는 만년필 , 따뜻한 일기를 쓰고 싶을 땐 연필을 쓴다.

일기는 피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늘 연말이 되면 두꺼운 일기를 보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정리를 한다. 빼곡한 글자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내용들을 보면서 언제나 인생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인생을 산다는 걸 배운다.

난 오늘도 일기를 쓴다. 앞으로도 일기를 계속 쓸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한 달 용돈 25만 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