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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Jul 12. 2022

엄마의 떡국

여름이라고 난 찬물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얼음을 많이 먹었다. 냉장고는 작았어도 엄마는 항상 얼음을 얼려서 더운 날은 오이냉국에 얼음을 띄워서 식구들이 먹을 수 있게 얼음을 보관하셨다.

한 여름 아빠도 더우면 등목을 하시고는 늘 냉국을 드시며 "진짜 맛있다" 하시며 드셨다. 그러나 아빠와 난 위와 장이 약하다. 그래서 너무 많이 먹는다는 개념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으나 찬 것을 자주 먹으면 배탈이 났다.


그럼 엄마는 레퍼토리로 "그러니까 적당히"라는 말씀으로 아빠와 나에게 안쓰러움을 표현하셨다.

꿀꿀이 슈퍼집에서 돌아서 한 20여분 지나면 방앗간이 있었다. 엄마는 쌀을 가져다 떡을 뽑아서 가래떡을 가져오셨다.

뜨끈한 가래떡에 일차적으로는 꿀에 찍어 먹었고 배가 아픈 날엔 꼭 엄마는 저녁에 떡국을 끓이셨다.

가스도 없는 우리 집에서는 늘 연탄으로 음식을 하셨는데 그 뜨거움을 참아내는 엄마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난 그런 엄마의 이마를 닦아주며 "엄마 더운데 왜 이걸 먹어?"라고 물으면 "배탈에는 뜨끈한 걸 먹어야지" 하시며 가래떡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떡국을 해주셨다.


그렇다, 육수는 자주 가는 고깃집에서 잡뼈를 가져오셔서 육수를 하셨는데 잡뼈는 다 합쳐서 지금 생각하면 5천 원 정도였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하며 엄마는 우려내시며 "이게 그래도 그냥 먹는 거랑 다르지" 하시며 가족들 건강을 챙기셨다.

엄마는 미역국도 자주 끓이셨다. 그렇게 잡뼈가 들어오는 날에는 두 가지였다. 미역국과 떡국, 한여름 덥다고 찬 것만 먹다가 배탈이나 감기 기운이 들라치면 엄마는 뜨거운 음식으로 이열치열로 이겨내라고 하셨다.


그랬을까? 엄마의 염원으로 기적처럼 아픈 배는 사라지고 차곡차곡 내 배에는 떡 알이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더웠지만 계절 상관없이 먹는 떡은 정말 별미였다.

한 그릇 다 먹고 나면 엄마는 동네 몇 집에 돌렸다.

꿀꿀이 슈퍼집에 모인 분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니 이  더운 날에 이걸 했다고?"

하면 엄마는 "아니 우리 집 양반이 배탈이라" 하면 아주머니는 "참 착해 그러고 보면" 하시면서 다들 한 숟가락을 하셨다.

서로 주고받는 음식 속에서 남의 가정의 애환을 들으며 하루해가 지면 엄마는 빈 그릇을 수거해 집에서 씻고서 "내일도 한 번 더 먹을 수 있겠다" 하시며 흐뭇하게 주무셨다.


며칠 전 배앓이가 있었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엄마와 살았다면 아마도 떡국을 먹었겠지?

마트에 가면 싸고 맛있는 떡국이 있지만 내가 끓이면 맹물에 그냥 먹는다. 그래서 맛이 없다.

엄마에게 부탁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수고스러운 일, 그래서 난 먹지 않기로 했다.


한가정의 음식을 하는 일이란 그저 음식이 아니라 건강을 챙기고 자신의 노력과 땀을 내야 하는 일임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난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이 집안을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이제야 보인다.

감사하다, 그리고 난 늘 말씀드린다.

"이제 좀 쉬어"

그럼 엄마는 그러신다.

"나의 은퇴는 없어" 

어쩌면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렸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의 음식이 내게 최고인 것은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정성이라는 글자가 더 들어가서인지도 모르겠다.


더운 여름 뜨거운 음식으로 배를 채웠던 그 해 , 난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지만 엄마 손이 약손이라며 그렇게 이겨냈던 여름이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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