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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Oct 06. 2022

김밥에게도 희노애락이 있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이건 내가 너무 잘 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알았고 삶에서도 너무 잘 알았다.

2학기 기말이 끝나고 다들 짐가방을 챙기는데 공문이 붙었다. 두 개가 붙었는데 하나는 출판사에서 교정 교열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꽤 높은 페이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야학이었다. 친구와 난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기숙사 연장 신청 기간이 다가올 때 즈음 조교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다.

"몽접아 너 고향 가니?"

난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선배님은 "너 공부할 거지?"

난 "글쎄요"


선배님은" 어 너 만약 내가 제안하는 거 수락하면 우리 대학원 공부하는 수업 들어와서 함께하는 거 기회 줄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난 "저 공부 안 할.. 잠깐만요, 대학원 지금 대학원 다니는 분들과 공부요?"

귀가 번쩍 뜨였다.

선배님은" 그래, 내가 기회를 주마, 그런데 매번은 안될 것 같고 일주일에 한 번"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생각을 해야죠?"

선배는 "내일까지"

난 물었다.

"조건은요?"

조교 선배님은 "우리 학교 구역에 야학, 오후에서 저녁까지, 너 정도라면 믿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어때?"

난 "저 경험이 없어서요"

선배님은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난 고민을 했다.

결국 난 하루를 고심하고 야학을 하기로 했다.


이런 야학을 하러 간 그곳에는 이미 앞면이 있는 다른 과 친구도 있었다.

"야 너 언제부터.."

친구는 "나도 오늘이 처음이야"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난 야학을 쉽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곳은 정말 열정이 넘치고 공부에 대한 각오가 남다른 곳이었다. 조교 선배와 공부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하지 못했다. 이유는 난 합격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미리 공부를 해 가야 헸고 절대로 듬성듬성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책임감으로 결국 그 대학원 파트 공부는 포기를 했다.


그건 나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앞면 있는 친구도 그런 꼬임이 있었지만 결국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며 자판기 앞에서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경험도 없는 얼치기로 시작했다.


시간은 오후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정말 빡빡한 수업이었다. 난 고등부 졸업반이라 중등부 졸업반 하시는 분들은 부러워하셨고 나와 같이 하시는 분들은 고전시가와 한문이 나오는 파트 부분은 정말 힘들어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어렵게 꾸려 나갔다. 세상 쉬운 거 없다지만 정말 어렵게 시작했다.


어르신들의 평균 연세가 50세가 넘으셨다.

그분들 중 몇 분은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 수능을 준비하시겠다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르신들과 시간은 생각보다 잘 갔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건 어르신들이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는 거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발 부탁이니 그냥 "학생"이라고 불러달라고 여러 번 청을 넣었지만 번번이 실패, 결국은 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정중히 드리며 다녔다.


그렇게 겨울을 지나갈 때 즈음 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집이었다. 한참 수업을 하는데 진동이 왔다.

아무 일 업이 늘 그냥 전화겠거니 했다.


수업을 마치고 전화를 하니 아빠의 작은 차사고 소식이었다. 하지만 사고는 사고 병원 엠뷸런스에 실러 수술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는 충격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수업을 접고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야학은 약속, 지켜야 했다.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마냥 울 수는 없었다. 아직 남은 수업이 2시간이 있었다.

결국 근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고 난 다시 수업을 하는데 목이 메어왔다.


눈치가 빠른 어르신 한 분이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난 "아뇨"라고 답을 했지만 어르신은 "아닌데 목소리가 아니야"

하시며 어르신들이 웅성 거리셨다.


그래서 난 결국 이야기를 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방금 차사고가 나서요"라고

그러자 "그럼 가보셔야지"라고 다들 가라고 하셨지만 난 "아닙니다, 괜찮으실 겁니다"라고 하고 진도를 나갔다. 그리고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 그때 나이가 가장 많은 어르신이 나에게 오셨다.

"선생님 오늘이 가장 힘드셨죠?"

난 "네 좀 그렇네요"

어르신은 "글쎄요.. 살면서 여러 일들이 있는데 매번 순간이 고비예요"

난 묵묵히 들었다. 어르신은 잘 될 거라며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셨다.

"사실 이거 시작하면서 드리려고 했는데..."

은박지에 싼 무언가였다.

"저를요?"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어르신을 봤다.


어르신은 "저 여기 나오는 거 바깥양반은 몰라요, 그래서 매번 운동한다고 하고 나와요. 그래서 이렇게 김밥을 매일 싸요. 여기서 먹는데 선생님은 어째 안 드시는 거 같아."

난 "저 먹어요. 어르신 걱정 마세요"

어르신은 "아닌데.." 하시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이셨다.


어르신은 "나 결혼할 때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했거든, 그런데 이게 나이가 드니 맘에 걸려서 이번에는 꼭 졸업하고 싶어요. 계속 나오실 거죠?"

난 그 어르신의 눈빛을 보고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네 최선을 다해볼게요"

어르신은 그제야 웃음을 보이시며 "이거 김밥 , 꼭 드세요. 그리고 좋은 일 많을 거예요"

그렇게 난 받은 은박지에 무언가는 김밥이 있었다.


연세가 거의 70세,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10대 못지않았다.

난 그 어르신이 합격하길 바랬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겨울을 끝내고 헤어졌고 우리 기수 다음 기수들이 후임으로 들어갔다.

그 후 소식은 그 어르신이 합격을 했다는 좋은 소식으로 난 훗날을 기억했다.


태어나서 많은 김밥을 먹었지만 그때 먹은 김밥은 잊을 수 없다. 김밥 속은 간단했다. 단무지 달걀지단 햄 이렇게 세 개였는데 참 맛있었다. 볼 때마다 손녀 같다고 하시던 어르신의 그 정성에 늘 나에게 "단단하게 살아요" 하시며 가시던 어르신이었는데 김밥을 볼 때마다 누구에게 잊지 못할 김밥이라는 게 있는데 나에게는 그 김밥이 잊지 못할 김밥이다.


난 사실 야학을 하면서 내가 더 많은 걸 배웠다. 겸손과 삶의 가르침을 배웠다.

어르신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냥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새겨들었고 농담도 늘 뼈가 있으셨다.


한 번은 여쭤봤다.

"어르신 사는 게 뭔가요?"

이 어르신은 항상 밝으시다. 그래서 별명이 햇님이셨다.

어르신은 "사는 거 답이 없지. 그냥 웃는 거" 깔깔 웃으셨다.


그때 바로 뒷좌석에 있으셨던 어르신이 연이어 답을 주셨다. "내가 이러다 죽지 싶을 때 해가 쨍하고 떠요. 걱정 말아요,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더라고 어휴 내가 그걸 지금 60 평생 살면서 느꼈어요" 주변에서는 맞다는 의견으로 박수를 치고 나는 그렇게 배워가면서 그곳을 다녔다.


가끔씩 쉬는 시간에 농담을 하시면 늘 결론은 인생에 공짜 없으니 공부 열심히 하자,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같이 공부하시는 분 중 한 분이 한글을 정말 늦게 공부하셔서 그 한을 풀고 나서 펑펑 우셨다고 하셔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남자 어르신이 "대단하네, 그게 바로 공부에 대한 열정이에요, 애들은 절대 모르지" 하시면서 같이 눈물을 훔치셨다.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게 흘러간 세월을 회상하시며 야학까지 오시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시며 자신의 삶을 곱씹으셨는데 그날은 수업보다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었다.


시간은 흐르고 다음 기수에게 넘겨야 해서 헤어질 때는 간단한 다과를 하면서 사진을 찍었고 내 인생에서 정말 뜻깊은 시간을 가지며 겨울을 보냈다.


처음 조교 선배에게는 대학원 공부에 혹해서 한다고 했지만 난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가며 공부를 했고 가끔씩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혼과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의를 다시 내리기도 했다.

역시 책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며칠 전 선배를 만났다. 이제는 아기 아빠가 되어서 너무 바쁜 육아에 정신이 없다는 선배는 나에게 20대의 나의 모습을 열정 그 자체였다고 이야기해주셨다. 감사했다고 이야기를 전하며 짧은 대화를 끝으로 그때를 잠시 회상했다. 그리고 김밥 이야기를 했더니 선배도 그때 받은 김밥이 제일 맛있었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내 인생 김밥은 70세 학생이 싸주신 김밥이다. 다시는 못 먹는 김밥 말이다.


김밥에게도 희노애락이 있다. 그 김밥은 나도 그분도 희노애락으로 먹은 김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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