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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Dec 12. 2022

아빠를 이해하는게 수학공식보다 어려웠어요.

우리 아빠는 정말 평범한 아버지다. 사실 아버지라는 단어보다 아빠라는 단어가 더 붙는다.

일단 내가 태어났을 때 난 이국적인 외모로 태어났다. 어린 나를 엎고 엄마가 동네를 나가면 "남편이 외국인?"이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럼 엄마는 "아니요"라고 어색하고 웃으시며 들어오셨다고 한다. 내가 봐도 내 어릴 적 사진은 정말 외국인처럼 생겼다. 그리고 아빠는 그 당시에는 잘 없을지도 모르는 진한 쌍꺼풀에 큰 키로 공부도 연애도 할아버지 몰래몰래 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 쌍꺼풀은 자연산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엄마와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자기 딸 어디서 수술했어?" 그럼 엄마는 당황해하며 "무슨.." 하면 손님은 "에이 뭘 숨기고 그래 , 요즘 쌍수는 수술도 아니고 시술이야" 하시며 윙크를 날리시는 분에게 엄마는 "우리 큰딸은 아빠 판박이" 그럼 아주머니들은 "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다" 하시며 붕어빵을 사러 오신 건지 쌍수를 물으러 오신 건지 참 많이들 물어보셨다. 난 그게 신기해서 "엄마 내 쌍꺼풀이 그렇게 정확해?"라고 물으면 "너 태어날 때부터 쌍꺼풀이 아주 진해서 나도 신기했지" 하시며 웃으셨고 엄마는 "예쁘잖아, 있고 없고 차이가 얼마인데" 하시며 물어보시는 손님들에게 "우리 애는 아빠 판박이요"라고 하셨다. 엄마는 속 쌍꺼풀이라서 여동생은 또 엄마다. 


이렇게 아빠의 외모는 여기까지.

난 아빠를 이해하는데 수학공식보다 더 힘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은 공식적으로 보면 힘들지 않아도 되었다.

두 분 다 공무원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빠는 인심이 좋은 건지 타고난 성격 탓인 건지 보증을 너무 많이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없는 그 망할 놈의 연대보증으로 난 너무 힘들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 집은 너무 힘들어서 쌀 사 먹기도 힘들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었고 두 분 다 월급이 들어오면 빚을 갚는데 썼다.

그래서 아빠는 술을 드시면 흔히 말하는 짤짤이로 동전을 주시면 우리는 의례 저금통에 넣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차면 남들은 뭘 사 먹었겠지만 우리는 엄마가 이자를 갚는데 도와 드렸다. 결국은 돌고 도는 돈이었다.


돈에 대한 관념은 이때부터 나에게는 애증의 대상이 이었다. 돈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힘들게 할까? 그래서 어린 마음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돈을 빨리 갚고 자유롭고 싶었다. 다들 어렵게 사는 꿀꿀이 슈퍼집에서 유일하게 제일 잘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뭐든 잘 버리는 집이었다. 그래서 난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잘 버리는 사람과 뭐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기준은 돈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를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돈이 문제이지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를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던 그날은 정말 아빠가 싫었다.

엄마의 티셔츠 사건이었다.


그날은 요즘 같은 겨울이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집으로 놀러를 오셨다. 엄마는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장을 보는데 난 그게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시어머니라는 이름이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문제는 저녁이었다.

다 같이 앉은 개다리소반에 엄마는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내놓고 우리 자매에게 반찬을 아껴 먹으라는 이해 못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때였다.


개다리소반에서 밥을 먹는데 엄마의 티셔츠가 늘어져 있었다. 난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서 "아빠 엄마 티셔츠 "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자신의 손으로 티셔츠를 매만지시며 "무슨 말이야 어서 먹어" 하시며 자리를 뜨셨다. 난 화가 났다. 엄마의 티셔츠는 늘어지다 못해 거의 버려야 할 수준인데 할머니가 오셨다고 어디서 없는 돈으로 고기를 구우셨는지 그게 화가 나서 아빠에게 나름의 반기를 든 것이다.

할머니는 그 분위기를 아시고는 "아이고 내가 눈치가 없었다. 내일 잔치가 있어서 왔는데 내일 바로 가야지"하시며 누우셨고 아빠는 할머니 잠자리를 봐주시고는 나오셨다.


심하게 뿔이 난 나는 엄마에게 "엄마 그렇게 살지 마, 아빠가 빚진 건데 엄마가 왜 이렇게 살아?"라고 이야기했다가 엄마에게 엄청 혼났다. 엄마의 지론은 부부는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빠는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딸 많이 화났어?"

난 여태까지 난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응"

아빠는 "미안해 엄마가 그런 티셔츠를 입었다는 걸 오늘 또 봤네, 다 아빠 탓이다"

난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엄마 티셔츠 아빠가 바꿔줘"

아빠는 "내일 당장 사줄게"

난 "응"

그렇게 난 바로 잠이 들었고 일어나니 작은 메모가 있었다.

메모는 엄마가 쓴 메모였는데 요약을 하자면 나의 행동이 좀 넘치는 행동이긴 했으나 엄마의 마음 아픔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는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고 아빠와의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그 빚을 갚는데 10년 이상이 걸렸다.


빚을 다 갚은 날이 생각이 난다.

삼겹살을 먹었다.

다 같이 둘러앉아 먹으면서 지난달에 다 상환을 했다시며 엄마는 매우 좋아하셨고 아빠도 미소를 떠나보내지 못하셨다.


난 수학을 정말 못한다. 시간 대비 비 효율적 과목이었다. 그래서 늘 수학이 없었으면 좋겠다 했다. 그러다 중학교를 넘기고 고등학교를 가면서 어떻게 어렵게 공부를 넘겼다. 수학을 이해했다고 하면 그건 어불성설이고 그나마 학교 수업을 이해했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난 수학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렵게 아빠를 이해하고 시간이 지나서 지금은 아빠가 엄마에게 자상한 것이 마음에 든다.


뒤늦게라도 엄마에게 못다 한 사랑을 주시는 것 같아서 흐뭇하다.

노년에 바라는 모습은 저렇게 뒷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아빠는 엄마를 위해 흔들의자를 구입하셨고 엄마는 그곳에서 독서를 하시거나 뜨개질을 하신다.

아빠는 직접 엄마를 위해서 식탁을 만드셨고 요즘은 엄마와의 뒤늦은 삶을 살고 계신다.

그래서 난 아빠에게 늘 감사한다.

엄마는 내게 그때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낸 전우라고 아빠를 평가하셨다.


아빠를 이했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고 보니 아빠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삶이 힘드셨겠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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