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접 Dec 21. 2022

팥죽 한 그릇 드세요.

때는 이맘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꿀꿀이 슈퍼집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과 손녀 이렇게 둘만 사시던 분이 계셨다. 어르신의 존함은 모르나 다들 충남댁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충남에서 오신 거라고 하셨다. 어르신은 아들과 며느리의 이혼으로 손녀를 딸처럼 기르셨고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아들을 위해서 그날만큼은 꿀꿀이 슈퍼집에서 과도한 지출을 하셨다. 지금처럼 파지를 줍는 것도 아니고 그 어르신은 봄에는 봄나물로 좌판에서 장사를 하셨고 여름에는 과일로 가을에는 나물로 이렇게 겨울이 되면 그 어느 것도 하기 힘드셔서 드문드문 일을 하셨다. 손매듭이 좋으셔서 가끔 이불솜을 타는 집이 있으면 가셨는데 내 기억에는 한복집에서 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은 이렇게 날씨가 추웠다. 다들 연탄으로 생활하는 우리 동네에서는 하루에 3번을 갈아가며 인사로 "연탄은 갈았지?" 하며 인사를 했는데 그날 어르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은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꺾어서 두 번째 집이었다. 엄마는 그날 팥죽을 하셨다. 5일장에 팥을 사셨고 쌀을 빻아서 옹심이를 만드셨는데 사실 난 팥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옹심이를 좋아해서 엄마에게 올해에는 옹심이를 많이 하자고 했지만 엄마는 그렇게 먹으면 먹을 쌀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넉넉한 엄마는 팥을 끓여서 내리고 시간을 보낸 다음 하루종일 팥죽을 하셨다. 한집마다 돌릴 생각에 마음이 급한 엄마는 내게 동네 어르신들 계신지 확인하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다들 "좋지, 얼마나 하셨냐?"라고 물으시면 난 "많이요" 하면서 집집마다 돌면서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집 충남댁 어르신이 보이지 않으셨다. 손녀가 있었다. 손녀 이름은 미정이었는데 미정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난 미정이에게 "미정아 할머니는?" 미정이는 울먹이면서 "할머니 어제도 없었어" 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린 마음에 난 "그래?" 하면서 미정이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함께 했고 엄마에게 어제부터 충남댁 어르신이 보이지 않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꽤 심각하게 생각하시고는 꿀꿀이 슈퍼집으로 다들 모여야겠다시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반상회를 급히 열었다.


미정이 말로는 할머니가 아빠를 찾으러 간다고 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다고 했다. 어른들은 "충남댁 어르신 이러다 길을 잘못 드신 거 아니야?" 아저씨들은 이야기하셨고 아주머니들은 "이러지 말고 우리 흩어져서 찾아봐요, 그리고 애들에게도 흩어져서 찾아보라고 하고 어때요? 오후 되면 캄캄해서 못 찾아요" 꿀꿀이 슈퍼집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다들 찾아보자고" 그렇게 난 내 동생과 함께 손을 잡고 찾으러 나섰다. 얼마나 돌았을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왔을 때 경찰이 도착해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난 엄마에게 물어볼 요량으로 옆에 있었는데 경찰은 할머니에게 "아니 할머니 남의 집을 그렇게 들어가시려고 하면  그 집은 얼마나 놀라게요, 그곳에 아드님이 있다는 증거도 없고" 할머니는 노기 어린 음성으로 "내가 똑똑히 봤어" 결국 할머니와 경찰은 같이 그곳으로 갔는데 결과는 아드님이 아니었다. 닮은 사람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매달 한 번씩 들리던 아들이 오지 않았고 어르신은 장날에 아드님과 비슷한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는 걸 봤단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가려고 추운 날씨에 버티고 버티시다가 그 집 근처 친구네 집에서 주무시고 그다음 날 남의 집에 들어가려고 벨을 계속 누르셨단다. 결국 그 집에서는 신고를 했고 결국 손녀는 그날 혼자 남은 거였다.


훗날은 결국 아들은 오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그 꿀꿀이 슈퍼집을 떠날 때까지는 그 이후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나쁜 놈이라고 했다. 연세도 많고 허리는 굽어서 당신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분에게 손녀를 저렇게 떠밀면 어떻게 하냐고 다들 혀를 찼다. 하지만 그걸 입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후 동네에서는 반찬이며 떡이며 고루 나눠 먹었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후 정말 잔치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끓인 팥죽이 완성이 되었고 아빠와 난 각각 그릇에 담아서 동네에 돌렸다.

한기에 따끈한 팥죽은 그만한 효자가 없었다.


충남댁 어르신에게는 엄마와 내가 같이 갔다.

"어르신"

어르신은 "아이고"

엄마는 "어르신 팥죽 드세요"

어르신은 "이 귀한 걸 직접 하셨어요?"

엄마는 "네"

어르신은 "고마워요, 내가 괜히 소란 피웠어요"

엄마는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걱정 마세요. 손녀분 저희들도 잘 돌볼게요. 아시잖아요. 저희 동네 인심"

어르신은 눈시울을 붉히시며 "내 자식이지만 참..."

내 기억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다른 집에는 한 그릇을 드렸지만 어르신댁에는 한 그릇이 아니라 한통을 드린 걸로 기억한다.

엄마의 지론에 따르면 어른들은 팥죽을 좋아하셔서 두고두고 드실 거라며 꽤 큰 통으로 드린 걸로 기억한다.


어르신은 몇 번이나 고맙다며 문 앞까지 나오셨고 난 인사를 드리며 미정이에게 "미정아 동화책 보려면 우리 집에 놀러 와" 하며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집에 도착해서 그제야 우리 먹거리 팥죽을 개다리소반에 올려놓으셨고 그날은 배 터지게 먹었다.

사람들에게 전해 돌린 팥죽의 빈그릇에는 더 탐스러운 과일로 돌려받았고 그게 인심이라며 엄마는 "아이고 뭘 이렇게" 하시며 웃으시며 그릇을 돌려받으셨다.


이렇게 춥고 팥죽이 생각나면 어릴 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맛집 팥죽이라며 줄을 서는 광경을 보면 옛 추억에 잠시 발이 멈춘다.


"어르신 팥죽 한 그릇 드세요"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어르신에게는 팥죽 한 그릇이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세상인심 그때만큼 좋았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만삼천원치의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