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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Apr 26. 2023

자전거로 20년 밥벌이

아빠는 자전거로 거의 20년 밥벌이하셨다. 어렸을 때는 멀리 가면 기차를 이용했고 강가나 근처 언덕 갈 때 아빠 자전거 안장에 앉아서 여유를 즐겼다. 어렸을 때 내가 생각한 아빠 자전거는 놀이기구이고 어쩌다 큰 상 받으면 칭찬에 인색한 우리 집이지만 운 좋게 자전거 한 바퀴를 태워주셨다. 그날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남들은 상 받으면 뭐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집이라 상장이 라면 받침대로 쓰였다. 그래서 뭘 받는다는 기대는 일찍이 접었다.


자전거, 그래 자전거 이야기를 해야겠다. 자전거는 우리 집에서 애증에 산물이다. 자전거가 따르릉 하고 울리면 귀신같이 엄마는 밥을 차리셨고 자명종 보다 더 정확한 소리에 맞춰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집이 없어서 전세살이를 했기에 늘 자전거는 집 밖에다 묶어두고 살았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자전거털이 범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스무 번도 넘은 듯하다.


그날은 날이 엄청 추웠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문이 덜컹덜컹했다. 엄마는 뜨거운 유자차를 아빠에게 권하며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아빠는 무슨 소리냐며 아껴야지 하셨다. 집 밖을 나가셨는데 자전거가 없었다. 우리는 뛰어나가 자전거가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졌지만 없었고 결국 아빠는 걸어서 그날 출근을 하셨다. 우리 부녀는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즈음 동네에서 인사만 하는 아는 오빠가 아빠 자전거와 너무나 비슷한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는 걸 내가 보았다.


그때 난 엄마에게 -엄마 정말 비슷하지?-라고 했고 엄마도 동의를 했다. 너무 근거 없이 달려들면 당활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오빠에게 인사했고 못 보던 자전거 어디서 샀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주었다고 했다. 그 말에 대충 짐작하고 아빠가 유일하게 자신 자전거에 이름 적어 놓은 부분이 안장이다. 그 부분 확인하면 끝이라 오빠에게 안장을 봐도 되겠냐고 했더니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네가 왜 보려고 하냐고 따져 물었다. 내 표정을 숨기며 신기해서 그렇다고 태평한 모습으로 안장을 보니 역시 아빠 이름이 있었다.


난 오빠에게 -이거 우리 아빠 거야-라고 했더니 오빠는 무슨 근거냐고 따져 물었고 안장 이야기를 했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서 자전거를 버리고 도망갔다. 그 장면을 본 엄마는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오시며 -참 사람 다양하다. 저 친구 지난주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하셨다. 그 사실도 모르고 왜 왔냐고 물었더니 알고 보니 오빠네 할머니가 생신이라 동네에서 모른 척할 수없어서 간단한 다과를 했다고 하셨다.


울분이 차올랐다. 아빠 자전거를 훔친 것도 울분이 찼고 겨울 추위를 이기고 나간 아빠 뒷모습에 순간 울음이 터져서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마루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이날 이후 가족회의를 하고 최대한 자전거 분실을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다. 하지만 이날 이후도 자전거 분실은 있었고 그때마다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정말 못 찾을 때는 사기도 했었다.


그렇게 대략 20년을 버티시고 결국 자동차를 사셨다. 사람들은 -아니 그렇게 돈을 벌었으면 자동차를 좀 사!-라고 말들을 했지만 아빠는 -돈 있다고 다 쓰면 남는 게 있냐요- 하시며 아끼시고 아끼셨고 처음 자동차를 산 그날 엄마는 간단한 고사를 치르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고 하시더니 할머니댁을 가셨다.


할머니는 아빠에게 고생했다, 하시며 등을 쓰다듬으셨고 아빠는 아니라며 손을 저으셨다. 물론 할머니는 엄마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아빠에게 자전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도 아빠처럼 밥벌이를 하는 나이가 되자 다시금 자전거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다.

어릴 때는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시간 나면 아빠에게 태워 달라고 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밥벌이 자전거가 되어 찾으러 다니니 자전거는 더 이상 로맨스를 꿈꿀 수 없었다. 어쩌다 자전거를 타게 된다면 그때는 아빠에게 허락을 받고 탔었다.


자전거 뒷자리는 늘 엄마도시락이 있었고 페달은 밥벌이를 위한 도전이었으니 자동차를 타면 편하다는 걸 모를 리 없으셨을 텐데 어찌 그걸 참으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자동차로 여행을 다니신다. 그리고 지난날 자전거 이야기하면 웃으시며 -희로애락-이라는 글자로 마무리 지으시며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않으신다.


지하철 버스로 출퇴근하는 나는 언제까지 밥벌이해야 할까, 를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일할 곳이 없으면 그때는 행복할까?라는 자문자답 하는데 그것도 썩 좋지 않을 듯해서 늘 일에 치이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 일이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라고 맘 고쳐 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부모님은 살아 있을 때 놀면 안 된다고 깡촌으로 들어가셨고 쉬면 안 되냐는 내 극성맞은 소리에 귀를 닫으시고 더 열심히 딱 먹을 만큼 농사를 하시고 때때 맞는 과일을 보내시며 지난날 가난했던 그 시절은 추억이 되어 더 달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신다.


가끔 자전거를 이용하시긴 한다. 그러면 예전처럼 페달을 밟으시며 -딸 뒤에 타!- 하시며 서울에서 있었던 내 피로를 풀어주신다.

감사합니다.

20년으로 자전거 밥벌이를 해주셨던 내 부모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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