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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Jul 31. 2023

함께 가만한 당신 / 최윤필

이 책은 중고서점을 들려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구입은 꽤 되었고 몇 번을 읽어서 외우고 싶은 개인적으로 매우 탐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내내 벅차오르는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우리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틈새에서 움직였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이 사회를 봐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수많은 꼭지를 두고 책은 읽게 되어 있으며 지나치기 쉬운 사건과 역사를 소개했다. 그러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많은 에피소드 중에 하나를 소개하겠다.

마이클 래트너( 1943-2016)이다.

마이클 래트너는 1943년 6월 13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걸인을 만나면 신발을 벗어주는 아버지와 전쟁 난민의 정착을 일삼아 돕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을 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그의 유대인 부모는 친척 상당수를 홀로코스트로 잃은 터였다. 아버지는 건축자재 회사를 운영하면서 전과자를 가족 삭사에 초대하고 일자리를 찾아주곤 했꼬 비서 일을 하던 어머니는 인종 차별 정책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플로리다공항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꿈은 고고학자가 되는 거였고 브랜다이스대학교 학부 전공은 중세 영어였다. 하지만 미국의 60년대는 그를 고대의 지층에 몰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그가 보기에 당대의 문명은 너무 위태로웠다.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강의를 들었고 반차별 정리. 운동가 앤젤라 데이비스와 친구로 지냈고 1967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해서 반전시위에 참여했다. 1년 휴학해 미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에서 법률 봉사자로 일했는데 그의 보스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상원 의원이 되는 인권변호사 컨스턴스 베이커 모틀리이다. 1966년에는 미국시민자유연맹 의장을 지내고 첫 시국 사건은 1971년 아티카 폭동이었다. 그는 수감자를 학대함으로써 폭동의 원인을 제공한 간수들과 폭력 진압한 주 방위군을 기소했지만 법원에 의해 기각당했다. 첫 패배였다. 이후 45년 동안 소송을 이어갔다.


그의 드문 승리 가운데 하나가 미국 헌정 사상 최초의 전시의 미국 대통령을 무릎 꿇린 관타나모 소송 2004년 6월 연방 대법원의 라술 대 부시 판결이었다. 9.11 테러 일주일 뒤, 미 연방의회는 부시의 무력 사용 승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이 아프간으로 파병됐고, 관타나모 수용소가 가동되었다. 레트너는 "내가 그 테러범을 변호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켤코 편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라고 훗날 말한다.


이후 레트너는 감옥에서 고문한 사실을 알리고 공개했으며 2008년까지 네 차례 연방 대법원에서 승소했고 수감자 779명 가운데 500명이 추후 재판을 통해 자유를 찾았다. 2014년 은퇴할 때까지 래트너는 엄청난 소송을 했으며 그의 중심사상은 늘 원칙이 중심이었으며 휴머니즘과 정의였다.

그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소송이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소송을 걸었고 결코 지는 건 두렵지 않다"라고 했다. 이후 그는 너무나 유명한 미국 국가안보국의 민간인 사찰 비리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지원했다. 그건 버락 오바마 역시 그의 소송 상대였다.


래트너는 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그를 인류의 인권과 존엄 정의를 위한 헌신적인 변호사로 추모를 했으며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데이비드 콜은 "래트너는 숱한 인권 소송들을 이끌며 법뿐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켰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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