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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Aug 03. 2023

20년 만에 초등학교를 방문하다.

제목 그대로이다. 20년 만에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했으나 이미 정년 퇴임을 하시고 찾아뵙기 어려워서 우리 반 친구들이 이번에는 음식점이 아닌 초등학교에서 만나자고 해서 고향방문 장소를 초등학교로 정했다. 언제 초등학교를 방문했던가를 생각하니 가물가물했다. 집과 가깝지만 이미 졸업은 오래전에 했고 그래서 지나치기 쉬워서 그냥 미소만 보내고 지나쳤던 그 초등학교를 간다니 괜히 두근두근 했다.


나도 버스를 타고 고향을 갔고 초등학교를 갔다. 만나기로 한 오후 1시에 교문은 열려있었고 카톡방은 한 명 한 명씩 곧 도착을 알렸다. 다소 일찍 도착했기에 먼저 이리저리 구경을 했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48명이었고 8반까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이제는 4반까지 있고 정원은 몇 명인지는 모르나 확실히 아이들은 줄어있었고 예전에는 간단한 놀이터가 있었는데 많이 없어졌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짝그네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인지 뭔가 휑했다. 중요한 것은 운동장이 작아 보였다는 거다.


괜히 시소도 앉아보고 타이어에도 올라가 보고 그렇게 있었는데 친구들이 도착했다.

친구 m은 "야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어떻게 다녔지. 작아, 운동장이 그렇지?"

난 "그러게 우리 겨울에는 거의 공부 안 하고 눈싸움하고 다니지 않았어?"

친구 s는 "그렇지, 선생님께서는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개방적이셨어. 공부보다는 확실히 개성을 존중하셨지"

친구 k는 "우리 그때 타임캡슐 묻은 거 기억나?"

난 "정말?"

친구 k"그때 우리 운동회 끝나고 우리끼리 묻었잖아. 우리 나이 20살에 재방문해서 열어보자고"

다들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때 친구 l은 "그때 내가 묻은 건 "고무줄"

그러고 보니 언뜻 기억이 났다. "아 맞아, 고무줄"

우리들은 고무줄을 정말 많이 했다. "야 내가 고무줄 하면 "s니가 많이 잘랐어.ㅋㅋ"

s" 야 그때는 재미였어, 이해해!!"

우리는 하하하 웃었다.


늦게 도착한 친구 w" 미안해 차가 밀렸다. 어, 애들이 이렇게 없어?"

난 "w도 애 한 명이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w는 "하긴... 그때 그립다. 우리 운동회 때 애들 쫘악해서 여자애들 전통 무용하고 남자애들은 소고하고 진짜 고생은 했지만 멋있었는데 그렇지?"

갑자기 s" 야, 그때 진짜 고생은 했는데 그거 알아? 나 집에서 소고만 치고 살았어. 악기에 꽝인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또 그거 알지. 중심이라서 혼자서 소고 딱 치고 중간에 일어서는 역할이어서 크~~~"


난 "다들 기억이 있네"

애들은 "야 다 있지"

오랜만이라 우리는 흥분이었다.

그리고 다행인 건 학교 앞 떡볶이집이 아직도 세 곳이었다.

오랜만에 모였기에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분식도 먹었다.

우리 때는 떡볶이 한 가락당 10원이었다. 그래서 10원치라고 먹었고 100원치면 10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많이 먹었다. 엄마는 설탕이 많으니 줄이라고 했지만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겨울이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100원을 먹으면 하나는 덤으로 주셨고 돈이 더 있다면 설탕으로 가득한 핫도그도 먹었다.


그날도 학교 앞 핫도그를 먹었는데 많이 바뀌었다.

그때보다 밀가루가 얇았고 소시지가 더 두꺼웠다. 그리고 설탕은 옵션이었고 가격이 많이 올랐다.

아주머니는 "아니 나이들이 있는데 , 어떻게.."

우리는 "저희 여기 학교 졸업했어요. 놀러 왔어요"

아주머니는 "그렇구나.." 환하게 웃으셨다.

아주머니는 "가끔 그래요. 졸업하셨다고 오시더라고"

나는 "애들 많아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으시며 이제는 거의 없어요"

나는"왜.."

아주머니는 "이 시골에 애들이 있다는 게 더 아이러니고 요즘 애들 별로 안 낳으니까 더 없고.. 여러 이야기가 있지..."


우리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별사탕도 사 먹고 불량식품도 구매해서 사 먹으며 예전을 이야기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아직도 문구점이 그대로 있었다. 그 문구점은 학교 앞에 딱 한 곳이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유지 중이었다. 알고 보니 아드님이 물려받아서 유지를 하고 계셨다.

사계절 가리지 않고 뽑기를 하며 재미를 붙였고 학교에서 뭐 사 오라고 하면 어지간하면 문구점에 다 있어서 일찍 가서 사면 인심 좋은 아저씨는 공짜로 지우개 하나는 주셨는데 그 추억이 그대로 생각나 그날은 애들과 함께 뽑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고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고서 헤어졌다.


사람에게는 여러 기억이 있다. 내게 있는 초등학교에 기억은 따뜻한 기억이다. 고무줄을 하면서 친구들과 더운 줄 모르고 했고 그걸 자르고 다니는 남자들을 잡겠다고 미친 듯이 따라다녔던 기억도 있고 공기를 하면서 추운 겨울이지만 교실 바닥에서 꺾기를 몇 번 하느냐에 따라서 고수가 되는 그 순간을 위해서 집에서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짝그네는 고소공포증을 이기며 탔고 그네를 타면 내가 하늘을 난다는 기분이 들어서 눈을 감고 타기는 몇 번을 탔는지 모른다.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면서 화장실에 내 낙서를 한 놈을 잡아야 한다며 분을 참아내지 못하며 다음날 그 친구를 잡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다닌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기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냥 추억으로 머물러 힘들 때면 '그래 그때는 그랬지'라고 하며 미소가 난다. 모든 사람에게 초등학교 기억이 다 좋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은 기억이 더 많은 듯하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한 초등학교 친구들에게도 고맙다. 초등학교 친구들 절반은 귀향을 해서 각자 역할을 하고 있고 절반은 나처럼 서울에서 언제 고향으로 갈지 고민 중이다.


나처럼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고향에서 자리 잡아서 사는 친구들을 늘 부러워한다. 고향역에 내리면 언제나 느끼는 그 묵직한 안락함을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씩 웃으며 "언제든 오라니까"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내려가면 우리는 뭐 하냐고"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다 먹고살아"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그럼 눈만 뻐끔한다.


우리는 더 자주 초등학교 앞에서 모이자고 말을 했다. 뭔지 모를 그 기억에 더 많이 웃는다고 우리만에 공간, 아지트가 이곳이 적당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내게도 그런 기억들이 많다. 그 기억들 중 하나가 초등학교 때이다. 그래서 그런가, 중학교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초등학교 기억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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