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접 Sep 30. 2024

우리는 성도 태생도 다른 오누입니다.

-9년의 세월을 기념하며 앞으로 더 웃으며 살아보자-

나에게는 적지 않은 제자들이 있다. 대학생활 하면서 아르바이트비를 벌어 보겠다고 학원에서 잠시 일을 했었다. 선배가 군대를 가면서 나에게 넘겨준 얼떨떨한 학원 생활을 하면서 얻은 보물 같은 제자들이다. 난 그런 아이들과 지금 10년이 넘은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남자아이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을 다니고 그때 사준 과자가 고맙다며 나에게 커피를 사주고 여자 아이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잠시 멘붕이 오면 나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나라고 뭐 답이 있을 리 없으니 그냥 "견디자"라는 말을 한다.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제자가 있다. 이 제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겨울이었다. 사실 이 제자는 태권도가 좋아서 태권도만 했다. 고등학생이 알법한 영어 문법을 알지 못했고 공부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 무슨 이유였는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고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를 처음에는 솔직히 몸을 쓰는 직업을 생각했다가 내가 하는 말에 영향을 받은 건지 본인이 생각해도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한 건지 "수학이 재미있다"며 뒤늦게 수학에 푹 빠져서 경제학과를 갔다.


나는 점수에 맞춰서 가라고 했지만 제자는 무조건 경제학과를 가야 한다고 경제학과에 다 올인해서 지원을 했고 다행히 합격을 해서 1등으로 입학하고 졸업에도 나쁘지 않은 점수로 졸업을 했다.

제자는 호기심이 많다. 경제학을 하면서도 응용과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동아리는 또 과학을 했고 나머지 시간은 부트캠프를 하면서 쉬지 않고 공부를 했고 쉬지 않고 대회에 나가서 많은 상을 타고 상금을 타면 어김없이 나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선물을 사주었다.


이런 제자에게 군대에서는 최악이었다. 사소한 문제에서 눈덩이처럼 불러와 오해가 커지면서 소위 말하는 문제 군인인 되면서 본의 아니게 마음고생을 하면서 정말 힘들었다. 학교면 전학이라고 가지, 군대라는 곳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나는 제자를 빼내기 위해서 매일을 싸워야 했다. 군대에서는 누나도 아니고 하다못해 친인척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전화하냐고 퉁을 주었지만 내 새끼 내가 살려야 한다고 이미 군에서 자리 잡은 제자들에게 조언을 구해서 그렇게 길을 걸었다.


나는 투사로 살았다. 저녁에 받는 폰 시간이 되면 무조건 버텨야 한다고 말을 했고 무너지는 가슴을 쓸어 담고 눈물은 최대한 참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미친 듯이 살았다. 겨우 탈출을 하고서 제자는 정신과 문제를 안고서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약을 먹으며 회사를 다닌다. 다행스럽게도 본인이 지원한 곳에 합격을 해서 나에게 밥도 사주고 많이 웃으려고 노력을 한다. 우리가 이렇게 지낸 9년의 시간이 그리 쉽지 않았다.


제자는 늘 말한다.

"선생님 우리는 성도 다르고 어디 하나 겹치는 게 없는데 왜 오누이를 믿을까요?"

나는 웃으며 "9년이잖아, 너는 다르다"라고 말을 하면 웃는다.


나는 한 번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무래도 전생에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전쟁이었지. 그런데 네가 장수였어. 그때 일본군에게 내가 위험할 때 네가 나를 구해준 거지. 그러니 내가 지금은 너에게 갚는지도 몰라. 히히"

그때 제자는 "음..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더 많이 받고 있잖아요"

나는 "그래 그럼 똑같이 받고 사는 걸로"

그렇게 우리는 찻집에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우리의 9년의 세월이 앞으로 세월을 더 빛나게 해 줄 거라는 믿음은 여지없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난 지금을 고마워하며 

나에게 아직도 선생님이라고 연락을 해주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다.


그대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어른으로 어떻게 늙어야 할지 고민하며 고민하겠습니다.

늘 그대들의 행복과 안녕에 기도 하겠습니다.

땡큐.

매거진의 이전글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아픔 없는 사람 없었던 추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