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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댁 Mar 20. 2022

Covid19가 덮쳤다. 그리고 땅이 흔들렸다.

Lockdown! 아무도 집에서 나오지 마.

 2020년 1월 새해 첫날부터 세상이 시끄러웠다. Youtube에서는 과연 이게 진짜일까? 싶은 믿어지지 않는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그저 먼 나라일이었다. 단지 중국에서 시작된 유행병이 한국으로 퍼질까 봐,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될 뿐이었다. 예전의 SARS나 MERS만큼만 세상을 시끄럽게 하겠지, 하는 걱정은 되지만 내 일은 아닌 것 같은 정도의 기분이랄까.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지난 2년간 겪어냈던 펜데믹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겪지 못해 본 일,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기들이었다.  


 2020년 2월 16일, 마지막 한국 그룹 여행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가면서, 인솔자 선생님이 이렇게 인사를 했다. "참 별일을 다 보고 사네요. 아무튼 이 역병이 끝나면 다시 뵈어요. 건강 조심하세요~" 우린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고, 길어야 몇 달 정도 못 보겠거니 했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을 걱정했다. 한국으로 그 나쁜 병마들이 손길을 미칠까 봐. 몸조심하시라고, 그렇게 웃으면서 헤어졌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인생이 그렇다. 


 한국을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어느 날 이탈리아 북부에서 발견된 코로나 확진자를 시작으로 코로나는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자고 일어나면 두배, 세배씩 확진자가 늘어났고, 국경 없는 하나의 국가를 지향했던 유럽연합은 다시 선을 긋고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옆 나라의 확진자가 내 나라에 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위스로 출퇴근을 하고 헝가리 사람이 오스트리아로 매일 들락거리는 상황에서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모든 시스템이 전산화되어있지도 않고, 사람들 특성 자체가 간섭을 싫어하는, 독립성이 유난히 강한 종족이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확진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당시의 의료체계는 무섭게 늘어나는 환자 속도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병상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를 알아야 싸워나갈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치료법이 확실치 않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공포심을 키웠다. 입원한 환자들이 퇴원을 해야 병상이 돌아가는데, 한번 병원으로 들어간 환자들이 오랜 입원기간에도 완치하지 못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계속되는 확진자를 받아줄 곳이 없었다. 쓸 수 있는 약이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은 나날들이었다. 급기야 유럽은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더 이상 접촉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그래서 더 이상 확집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이른바 락다운 Lockdown이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3월 19일 저녁 7시, 일명 까페거리라고 불리는 Tkalciceva 거리.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에서 사람이 집에서 죽고, 죽은 가족과 며칠을 보내고 있다는 영상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의료진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할 장소도, 인력도 부족했다. 슈퍼에서 장을 보려고 3시간씩 줄을 섰다. 허가증 없이 나가면 경찰에게 잡히거나 벌금을 물었다. 바로 옆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크로아티아는 일찍이 국경을 걸어 잠가서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EU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국경이 남아 있는 것이 이점이 되었다. 국경통제가 아직 가능해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주변국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닫자, 크로아티아도 사람들을 가두는 락다운 Lockdown을 발령했다. 평소처럼 아침에 식당 문을 열고, 장사 준비가 모두 끝난 시점이었다. 출근한 직원 모두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0년 3월 19일, 신랑 생일 오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냉장고와 냉동고에는 며칠 분량의 야채와 고기 등의 식재료 등이 그득히 쌓여있었다. 쌀과 같은 저장식품들은 몇 개월치가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에 먹지 않으면 상할 식재료들은 직원들에게 일부 들려 집으로 보냈다. 나와 신랑은 남아 뒷정리를 하고, 중요한 서류 등을 챙기느라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3월은 아직 해가 길어지기 전이라 7시만 되어도 깜깜해지는데, 유독 흐렸던 그날은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빽빽하게 늘어선 까페가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지난 십여 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리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그야말로 쥐새끼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신랑과 나는 손을 꼭 맞잡았다. 무언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3월 22일 새벽 6시 자고 있던 침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순간 놀라 잠에서 깨자마자 옆방의 애들한테 뛰어가려는 나를 신랑이 잡았다. 위험하다고. 나는 신랑에게 소리쳤다. "오빠! 애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우리 아들 둘. 밖에서 액자 등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판단이 서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오직 자고 있는 아이들만 생각이 났다. 


피아노,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액자 등이 모두 떨어졌다


 지진은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10여 초정도 흔들리고 멈추었다. 큰아이는 놀라 잠에서 깨어 앉아있었고, 작은 아이는 그 와중에도 잠이 들어 있었다. 나와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5분이 지나도록 뉴스 속보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SNS에 올라오는 소식들이 빨랐다. 규모가 5.9나 되는 강진이었다. 우리는 다행히 집안의 액자 등이 떨어지기만 했는데,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들은 많이 무너지고, 주변에 주차된 차들에 돌덩이들이 떨어져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건물 벽이 다 떨어져 나가 방이 훤히 보이는 곳도 있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가장 경악시킨 건 대성당 첨탑이 무너진 광경이었다. 가톨릭이 국교인 이 나라의 국민들은 하늘이 크로아티아를 버렸다며 침통해했다. 처음 겪어보는 락다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생전 처음 지진이라는 재난을 맞았다.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자그레브 중앙광장인 얄라치치 광장의 말 동상 뒤편의 건물이 우리 식당 건물이다. 센터의 건물들은 몇백년씩 된 건물이 많아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올라오는 소식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가깝게 지내는 한인들과 연락하며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밖으로 나간 들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크로아티아 땅에는 우리 가족뿐이었다. 잠시 피신할 수 있는 친인척이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을 보니, 우리 주변 이웃들은 급한 가방만 싸서 밖에다 내다 놓은 상태였다. 주차장이나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짐가방만 나와 있었다. 여차하면 몸만 뛰쳐나올 요량인 듯 보였다. 나도 급하게 옷가지 몇 벌과 여권 소지품 등을 챙겼다. 애들 옷도 갈아입히고 나도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차 한잔을 하면서 들려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진이 아닌 두 번째 지진이었다. 우리는 지체 없이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 우선 주차장 차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 해 겨울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3월 22일 봄날에. 모든 것이 마치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었다.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5백 년 된 건물에 위치 한 우리 식당이 걱정이 되었다. SNS로 올라오는 사진을 보니 주변이 다 무너졌던데, 아마 식기, 컵 등 다 깨져있겠지. 한국에서 사다 나르느라고 수천을 들였는데. 가게 문을 닫고 나니 지진까지 겹쳐서 정말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아, 정말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오는구나. 그렇게 차에서 2시간 여를 떨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단출한 짐을 보니, 마지막 순간에는 별로 중요한 물건들도 없구나 싶은 게 집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막상 짐을 싸려니,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이 느껴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 뭐하러 이렇게 이고 지고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툭,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식당 카메라에 잡힌 지진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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